자본시장의 역사 다시 쓰는 공매도 펀드
빌 애크먼 아케고스 부도 언급하며 복선
선의 포장된 기업 약탈적 행동 종말하나

칼 아이칸 아이칸엔터프라이즈 회장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칼 아이칸 아이칸엔터프라이즈 회장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인도 재벌 아다니 그룹의 무릎까지 꿇리며 연전연승 중인 공매도 행동주의 펀드 힌덴버그가 '월가의 황제'로 군림해 온 칼 아이칸을 겨냥해 폰지 사기(ponzi scheme) 의혹을 제기하면서 자본시장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폰지란 새로운 투자자들로부터 받은 돈을 과거 투자자들에게 지급하는 다단계 구조의 자산운용을 뜻한다. 결국 마지막 돈을 투자할 가방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위험이 전가되는 구조인데 기업 약탈적 행동주의를 일삼아온 '기업 사냥꾼'이 '공매도'라는 천적(天敵)을 만난 것이다.

29일 미국 뉴욕 증시에 따르면 네이선 앤더슨(Nathan Anderson)이 이끄는 힌덴버그의 공매도 표적이 된 칼 아이칸의 아이칸엔터프라이즈(IEP) 주식은 전 거래일 20.65달러로 마감하며 맥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2일 힌덴버그 리서치가 공매도 의향을 밝힌 이후 50.42달러에서 60% 가까이 급락한 것이다. 이미 IEP의 주가는 지난 2009년 이후 14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특히 칼 아이칸과 오랫동안 악연을 이어온 행동주의 투자자인 빌 애크먼이 참전하면서 주가 급락은 더욱 심화했다. 빌 애크먼은 지난 25일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려 "칼 아이칸이 IEP 주식으로 마진 대출을 사용했으며 그의 시스템이 힌덴버그에 의해 밝혀졌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힌덴버그는 최근 업데이트한 추가 공매도 보고서에서 "칼 아이칸이 본인이 소유한 IEP 주식을 담보로 34억 달러를 펀드에 재투자하고도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53%의 손실을 발생시킨 것으로 강력히 의심된다"면서 수학적으로 지속 불가능(Mathematically Unsustainable)한 배당금 지급이 이뤄졌다는 폭로를 이어갔다.

아울러 칼 아이칸이 1980년대 기업 약탈적 증권 사기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시점 IEP에서 다른 회사로 옮겨간 '제프리스 투자은행' 설립자 보이드 제프리와의 부적절한 관계도 지적됐다. 제프리스 리서치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상의 IEP의 순자산가치(NAV)가 22% 더 부풀려져 투자자들을 속였다는 주장이다.

힌덴버그 보고서에 따르면 칼 아이칸은 부정적인 재무 실적에도 불구하고 2014년 이후 3차례에 걸쳐 배당금을 인상했으며 배당성향 확대를 이유로 투자자를 유인했다. 이에 미국 연방 검찰은 이를 폰지 사기와 유사한 범행으로 보고 조사 대상에 올렸다. 미국 뉴욕 남부연방지검은 지난 3일 힌덴버그 보고서가 나온 지 하루 만에 기업 지배구조, 배당, 자본, 가치평가 등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칼 아이칸은 지금까지 다른 기업들의 지배 구조와 경영 투명성 문제를 비판하면서 주주행동을 벌여왔다. 힌덴버그가 그를 상대로 펼치는 전략은 이와는 차별된 공매도 전략이다. 공매도 행동주의는 주주총회 등을 통한 경영참여가 아닌 주가를 떨어뜨려 회사를 끝장내는 방식이다.

힌덴버그 리서치 공매도 보고서 발표 직후 60% 가까이 급락한 아이칸엔터프라이즈 주가. /출처=나스닥
힌덴버그 리서치 공매도 보고서 발표 직후 60% 가까이 급락한 아이칸엔터프라이즈 주가. /출처=나스닥

진짜 행동주의 묘미는 '파괴적' 응징
월가 탐욕 상징 헤지펀드 예외 아냐

공매도란 한자로 빌 공(空)자를 써서 '없는 것을 매도한다, 즉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판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공매도가 주가 폭락의 주범이며 개미를 잡는 사악한 투자라고 주장하지만 '무차입 공매도'가 아니라면 주식을 빌려서 판 뒤 주가가 내리면 다시 사들여 차익을 실현하는 합법적 투자 기법이어서 주주행동주의가 공매도란 천적을 만났다는 얘기가 나온다. 

빌 애크먼 역시 칼 아이칸을 겨냥한 공매도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2021년 봄 한국계 헤지펀드 매니저인 빌 황(Bill Hwang)의 아케고스(Archegos) 캐피털 부도 사태를 사례로 든 것이다. 아케고스는 앞서 보유자산의 5배가 넘는 규모의 과도한 레버리지(차입) 투자를 했다 주가가 급락하자 마진콜(투자 손실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증거금 요구)에 응하지 못해 부도가 난 헤지펀드다.

당시 아케고스에 돈을 빌려줬던 크레디트스위스도 약 47억 달러(6조7000억원)의 손실을 입으면서 파산 위기에 처했다(이후 USB에 인수). 빌 애크먼은 "IEP는 스와프 거래 당사자들이 각각 상황에 상대적으로 더 적은 노출로 위안받았던 아케고스를 생각나게 한다"면서 앞으로 마진콜 압력이 이어질 것이란 복선을 깔았다.

칼 아이칸이 실행한 마진 대출(margin lend)은 주식을 담보로 하는 대출이다. 주식 가치가 하락하면 대출금의 담보가치가 줄어들어 대출자는 대출금을 보호하기 위해 담보를 더 내야 한다. 이런 마진콜에 부응하지 못하면 증권사는 주식을 강제로 매각한다. 또 이렇게 되면 대출금 상환 후 칼 아이칸에겐 남은 돈은 한 푼도 없게 된다. 앞서 마진콜을 감당하지 못한 아케고스의 빌 황은 쪽박을 차고 연방 검찰에 기소됐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법령에 따르면 자금 조달 시엔 출처와 자금 조달 계약서 사본을 공개해야 한다. 하지만 칼 아이칸은 마진 대출을 누가 제공했는지를 포함해 마진 대출 조건을 공개하지 않아 왔다고 빌 애크먼은 폭로했다. 결국 행동주의 펀드 간의 내전이 격해지면서 미국에선 선의를 가장한 기업 약탈적 주주행동의 종말이 감지되고 있다.

네이선 앤더슨(Nathan Anderson) 힌덴버그 리서치 대표 /힌덴버그 리서치
네이선 앤더슨(Nathan Anderson) 힌덴버그 리서치 대표 /힌덴버그 리서치

네이선=나쁜놈이라고 욕하면서
적자 전환에도 '배당 확대' 고수

본지는 앞서 바이든도 말리는 자사주 소각인데···韓 금융위 불결한 동맹 조짐이란 기사를 통해 중산층과 일자리가 붕괴되는 동안 배를 불려 온 헤지펀드에 대한 미국 내 비판의 목소리를 전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주주환원율의 3분의 2를 차지하면서 기업의 중장기 투자 여력을 감퇴시켜 온 자사주 소각 남발을 막기 위해 세금을 4배(1%→4%) 인상할 것을 시사했다.

힌덴버그는 기업가치가 과대 평가됐거나 회계 부정 등을 자행하는 기업을 공매도로 공격해 망하게 하는 행동주의 펀드다. 2020년 미국의 전기트럭 스타트업 니콜라의 사기극을 폭로한 데 이어 미국의 모바일 결제 기업 블록이 앱의 이용자 수를 부풀린 점을 지적하면서 주가를 고꾸라뜨렸다.

특히 지난 1월 25일 인도 재벌기업 아다니 그룹이 주가 조작 및 회계 부정 등 사기를 일삼고 있다는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회사 주식에 공매도를 걸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증시에서 아다니 그룹 시총은 단기간에 15조원 가까이 증발했고, 한때 15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재산을 보유, 세계 2위 부자에 이름을 올렸던 아다니 그룹 총수 고탐 아다니의 재산은 현재 487억 달러(포브스 집계 기준)로 쪼그라들었다.

힌덴버그의 공격에 다급해진 칼 아이칸은 "네이선 앤더슨이 IEP 장기 주주들을 희생시키면서 공매도 포지션에서 이익을 내려는 것일 뿐"이라면서 "그는 멋대로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무고한 시민들에 해를 입히는 악인"이라고 비난했다. 또 힌덴버그 보고서 역시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며 폰지 사기의 결정적 근거로 지적된 '주당 2달러'의 분기 배당은 계속 지급하겠다면서 버티는 전략을 선택했다.

한편 칼 아이칸의 성명 발표 후 지난 11일 공개된 IEP 1분기 실적을 보면 2억7000만 달러의 순손실을 냈다. 아울러 주당 순손실도 0.11달러를 기록하며 0.19달러의 순이익을 기대했던 월가 애널리스트들의 전망을 크게 하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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