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뒤흔드는 대우건설 내부통제 판결
대법원 판시로 한층 강화된 이사진 책임
尹 중대재해법 개정방향에도 영향 미쳐
금감원은 경영책임자 제재-처벌에 방점

"금융감독원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전수조사를 진행한다고 해서 이사회에 참석했더니, 내가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라면서 서명을 요구하더라."
국내 한 캐피탈사 사외이사로 있는 대학 교수 A씨는 여성경제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은 당혹감을 토로했다. 상법 393조 2항에 따른 이사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서명은 했지만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내부통제가 날림으로 처리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느꼈다"고 전했다.
9일 법조계와 재계에 따르면 기업 이사진 모두에게 내부통제 등 법규 준수 여부를 감시·감독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내부통제를 비롯한 중대재해 사고에 대한 책임 범위를 놓고 혼선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니온스틸(현 동국제강) 대표이사가 내부통제시스템구축 및 유지관리의무 위반을 이유로 회사에 손해배상책임을 진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반년 만에, 사외이사의 책임까지 포함된 대우건설 주주대표소송의 상고심이 지난 5월 18일 선고되면서다.
본지가 입수한 판결문을 보면 대법원 제2부는 "회사의 업무집행을 담당하지 않는 사외이사들이 내부통제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고 의심할 만한 사유가 있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방치한 것은 감시의무 위반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내부통제시스템구축의무는 △시스템 구축을 위한 의사결정 △시스템 구축의 실행 및 구축된 시스템의 유지·관리 등 여러 단계로 나눠진다. 이같은 실무적 업무 분장에도 불구하고 이사회 구성원은 모든 단계에 걸쳐 법적 책임이 있다는 법리다.
법조계에선 유니온스틸사건에서는 대표이사만 피고로 돼 있어 모든 이사에 책임이 부과되지 않았지만, 대우건설 사건에선 대법원이 사외이사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상법 393조 2항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정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사외이사란 것이 감시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선임된 자이기 때문에 이번 선고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봤다.
尹 중대재해법 개정···대법원 법리와 유사
노동부 반기 들면서 책임 분산 어려울 듯
다만 윤석열 정부의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방향을 고려하면, 업무집행 사원이 아닌 사외이사까지 사고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무리한 법 적용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해 사망자 1명 이상의 중대산업재해에 이르게 한 경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지난 1월 24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에 윤석열 정부는 경영진에 대해 형벌이 아닌 경제벌을 부과하도록 하는 것을 개정 방향으로 삼고 △경영책임자에 대해 형사처벌 대신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과 △CSO를 경영책임자의 지위로 인정하는 방식을 논의 중에 있다. 이에 대해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은 "형벌보다 경제벌로 전환하고, 재해로 잃게 되는 인명보상비용을 높여나간다면 상응하는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회사의 상무에 종사하지 않는 사외이사도 대표이사, 사내이사와 동일한 감시 의무를 지며 민·형사상 처벌 대상에 포함된다는 점에 대해선 잡음이 일고 있다. 상법 393조의 규정을 빌미로 경영총괄책임자인 대표이사가 져야 할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 때문이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이와 관련 "안전과 보건을 담당하는 CSO는 대표이사처럼 사업체를 총괄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표이사에 '준하는' 최고안전보건 책임자가 선임된다면 대표이사의 중대재해법 의무이행 책임을 면제하는 규정이 필요하다"고 주문한 바 있다.

대법원의 대우건설 판결의 후폭풍은 금융사 지배구조법 적용을 받는 금융권에도 불어닥치고 있다.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은행 차장급 직원 전 모씨가 세 차례에 걸쳐 614억원을 횡령하는 과정에서 내부통제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뿐 아니라 신한은행에서도 횡령 사실이 내부감사를 통해 적발됐고 NH농협은행·새마을금고 일부 직원이 자수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금감원은 대대적인 제재를 예고하면서도 경영총괄책임자에 한정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6월 30일부로 검사가 마무리된 우리은행 횡령 사건 관련 이준수 금감원 부원장은 "내부통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복현 금감원장도 지난달 16일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상식적으로 수긍 가능한 내용과 범위가 아니라면 금융기관 (대표이사가 아닌) 내부통제운영 책임자한테 직접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대원칙은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