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독립돼야 통화가치 방어
산업 경쟁력 및 에너지 자급도 중요

1997년 이맘때에도 대통령 선거가 한창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DJP 연합이 극적으로 성사되면서 선거 국면이 야당 후보에 유리하게 변화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제2의 국치라 일컫던 국제금융기구(IMF)의 구제금융과 외환위기에 쏠려 있었다.
마크 모비어스(Mobius)를 비롯한 이머징 마켓 전문가들이 연일 TV에 나와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해 분석했다. 각 대학은 앞다퉈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과정을 신설했다. 저명한 학자와 전문가들도 한국이 외환위기로 가리라고는 거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학계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장기간에 걸쳐 경상수지 적자가 과다하게 누적된 결과, 외부 충격(shock)이 왔을 때 버티지 못하고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소진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재벌을 포함한 기업과 금융기관이 과도하게 단기 외채를 끌어와 투자에 사용함으로써 경제 펀드멘털이 흔들리자 외채의 만기 연장에 실패했고, 이것이 국제신인도의 추락과 달러에 대한 패닉 매수로 이어져 환율이 급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패턴은 한국 이전에 금융위기를 맞았던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국가도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를 해외로부터의 차입으로 메워 나가다 국제금융시장의 외부환경이 변화하자 자국 통화가 급격히 평가절하되는 환란에 직면했었다.
그렇다면 외환보유고가 취약한 신흥국가들을 위기로 이끄는 외부 충격은 무엇일까?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다. 미국 금리가 하락하는 완화 사이클(easing cycle)에 있을 때에는 금융 경색이 풀리면서 달러가 채권시장으로 흘러간다.
시중 금리가 낮아질수록 채권이 지급하는 이자수익의 가치가 커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미 국채(Treasury) 시장으로 자금이 유입되고 이후 회사채 시장으로 향한다. 또한, 채권값이 더 오름에 따라 종국에는 위험도가 큰 투기채(junkbond) 시장과 신흥국으로 투자 폭을 넓힌다.
그래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Fed)이 금리를 인하하는 시기에는 이머징 마켓에 투자 붐이 인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신흥국의 은행과 기업이 발행한 채권에도 뭉칫돈이 투자된다. 그러나 연준이 통화정책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하면, 신흥국 시장에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달러 금리가 오르면서 채권가격이 내리게 된다. 현재 보유한 채권을 팔아 현금을 마련한 뒤 추후에 보다 싼 가격에 채권을 사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채권의 가격 하락 위험을 증대시킨다. 또한, 채권시장에 자금 유입이 줄어듦에 따라 채권의 부도 위험도 커진다.
채권시장으로부터의 자금 이탈은 이머징 마켓과 고위험 채권에서 먼저 나타난다. 신흥국에서는 국내 자산을 팔아 달러로 바꾸는 과정에서 환율 상승이 나타나고 통화가치가 절하된다. 이로부터 외환위기가 심화한다.
그런데 환율이 크게 상승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까?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를 끌어올린다. 예를 들어 국제 원유 가격이 갤런당 40달러라 하자. 만약 1달러당 1,000원하던 환율이 2,000원으로 오르면, 원유의 수입 가격은 4만원에서 8만원으로 상승한다. 국제유가가 오르지 않아도 환율이 오른 만큼 국내 물가가 오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유가마저 상승하면 어떻게 될까? 국제 원유 가격이 갤런당 40달러에서 80달러로 환율과 더불어 상승하면 원유 가격은 이제 4만 원에서 16만 원으로 급등한다. 국내 유가의 급등은 고스란히 기업의 생산비용과 가계의 생활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런 끔찍한 시나리오가 최근 터키에서 현실이 되었다. 터키의 통화인 리라(lira)화 환율은 작년 2월 달러당 6.2리라에서 최근 13리라 이상으로 두 배 넘게 급등했다. 같은 시기 국제 원유가격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그러자 물가가 덩달아 뛰면서 인플레이션율이 20%에 근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중앙은행이라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을 고려할 것이다. 사실 터키 중앙은행도 금리 인상을 추진했다. 금년 3월 인플레이션이 16%에 근접하자 터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 포인트 인상했다. 작년 11월 같은 수준의 금리 인상에 이어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5%에서 19%로 올렸다. 이는 시장 예상보다 훨씬 강경한 조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었다. 금리 인상에 불만을 가진 에르도안은 취임 후 5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터키 중앙은행의 아그발(Agbal) 총재를 해임해 버렸다. 2019년 이래 세 번째 중앙은행 총재 경질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이자 정치인 출신인 캅시오글루(Kavcioglu)를 임명했다.
에르도안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금리를 옹호했다. 그것이 이슬람 신앙에도 합치한다고 봤다. 그에 영향받은 캅시오글루는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5%로 다시 내렸다. 그러자 리라화 환율은 달러당 13.5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말 그대로 외환위기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 중인 터키의 금융위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터키의 외환위기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1980년 당시 미국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는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20%로 연방기금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잡았다. 터키의 금년 초 인플레이션과 금리 수준은 당시의 미국과 비슷했다.
그러나 미국에는 연준을 지지한 카터 대통령이 있었고 터키에는 ‘터키의 볼커’인 아그발을 불신하고 중앙은행을 뒤흔든 에르도안이 있었다. 그 차이는 심대했다. 볼커의 과단성 있는 금리 인상으로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이 해결된 반면, 터키에서는 외환위기와 인플레이션이 극적으로 심각해졌다.
둘째, 국가 경쟁력의 중요성이다. 환율이 급등한다 해도 그 나라의 산업기반이 충실하다면 수입물가의 급등을 수출 가격의 증가로 흡수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제조업 기반이 튼튼했기에 외환위기 당시 환율이 오르자 수출이 급증하면서 위기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셋째, 에너지 자급의 필요성이다. 터키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산유국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국의 원유나 천연가스 생산은 전무하다시피 한다. 이로 인해 국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할 경우 그 충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에너지원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다.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종합금융회사에서 외환딜러 국제투자업무를 7년간 담당했고 예금보험공사에서 6년간 근무했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코넬대에서 응용경제학석사,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경영학박사 (파이낸스)를 취득했다. 2012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가드너웹대학교에서 재무·금융을 가르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