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의장 무책임한 사퇴에도 '침묵 모드'
글로벌 '룰 메이커' 자처하다 이중잣대 보여
K-ESG 기준 미비 틈타 더욱 활개치는 양상

ESG룰 메이커를 자처하는 미국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이중적 잣대가 도마에 올랐다. LG화학의 인도 가스 유출 사고에 대해선 경영 간섭을 일삼더니, 쿠팡의 물류창고 참사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다.
7일 재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의 K-ESG 기준 마련을 위해 이재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팀이 연구 용역을 진행중인 가운데, 국내 기준이 미비한 상황을 틈타 블랙록 등 해외자본의 경영 개입이 노골화하고 있다.
블랙록은 지난 2020년 5월 인도 LG폴리머스 공장에서 발암물질로 알려진 스타이렌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LG화학에 △사고 원인 △경영진의 대응현황 △재발방지 대책 등을 요구해 재계를 술렁이게 했다.
하지만 지난달 17일 쿠팡의 덕평물류센터에서 발생한 화재에 대해선 정반대의 행태를 보였다.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사고가 수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글로벌 경영에 전념하겠다"면서 직책에서 물러났고, 주요 주주인 블랙록 역시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대형 사고가 발생한 상황에서 최고경영자의 사임이 지난달 말 이미 확정된 내용이라는 쿠팡의 해명도 미심쩍지만, 그동안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하며 'ESG 경영'을 강조하는 블랙록의 침묵에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블랙록은 쿠팡의 단순 투자자가 아닌 자본잠식 상태에서도 자금을 투입해온 동업자다"며 "아무리 그렇더라도 유사한 사례를 두고 자기 식구만 챙긴다면 향후 ESG 투자에도 차질이 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블랙록은 2014년 쿠팡에 3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데 이어 2018년 자본잠식이 심해진 상황에서도 피델리티, 웰링턴 등과 함께 4200억원을 추가로 투입한 바 있다. 지난해까지만해도 블랙록은 금호석유화학 박찬구 회장의 백기사로 불릴 정도로 석유친화 펀드였지만 바이든 대통령 당선과 함께 갑작스레 ESG 수호자 행세를 하고 있다.
현재까지 ESG 정보공시 의무화를 비롯해 '택소노미'(Green Taxonomy, 녹색산업 분류체계)는 유럽연합(EU)이 주도해온 영역이었다. 하지만 블랙록 래리핑크의 비서실장 윌리 아데예모가 바이든 행정부의 재무부 부장관이 되면서 ESG룰 메이커를 자처하며 나섰다.
문제는 이 같은 블랙록의 행동주의가 LG화학의 사례처럼 경영개입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주식등의대량보유상황보고서를 보면 블랙록은 올초까지 연료전지 업체인 두산퓨얼셀(6.18%)과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한는 삼성SDI(5.01%) 지분을 늘렸다. LG디스플레이(5.01%), 삼성전자(5.03%), HLB(5.07%) 헬릭스미스(5.08%) 지분도 가졌다.
이 당시 래리핑크 블랙록 대표이사는 기업 CEO에 보내는 연례서한을 통해 "기업의 사업구조가 탄소중립(Net-zero)와 양립할 수 있는지 계획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해 기업들을 긴장케 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를 등에 업은 펀드가 각국의 ESG 공시 제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바이든호의 글로벌 전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재계 한 고위인사는 "아무리 돈이 권력이라지만 펀드가 공시영역을 넘어 개입하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라며 "블랙록이 제식구만 봐준다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ESG 행보에 앞서 글로벌 차원의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글로벌 합의 필요···미국서도 사회적 책임(S)은 주법에 따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조사 결과 블랙록의 아시아 주주권행사 건수는 지난 2019년 635건에서 2020년 904건으로 급증 추세다. 블랙록이 밝힌 ESG평가 주요 기준은 △이사회 우수성과 효율성 △기후와 천연자본 △전략 목표 및 재무 탄력성 △가치창출에 따른 인센티브 △이해관계자에 대한 회사의 영향 등이다.
미국 기업인 관계로 환경(E)과 지배구조(G) 부문과 관련해선 법적공시제도인 'Regulation S-K'의 지배를 받는다. 특히 환경(E), 사회적 책임(S), 지배구조(G)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면 임의공시 기준인 지속가능회계기준위원회(SASB) 기준을 따라야 한다.
김영훈 바른사회시민회의 경제실장은 "ESG 중에서도 사회적책임(S) 부분은 지역별 특성이 다양해 미국도 각 주별 법률을 따른다"며 "쿠팡과 LG화학을 차별 사례를 볼때 블랙록이 너무 앞장서는 것은 글로벌 차원에서의 합의 도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