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중국의 대음악가로 추앙받는 정율성

인민음악가 정율성기념관 (하얼빈)
▲ 정율성 초상화

중국의 3대 음악가중 하나로 꼽히는 정율성(1918 ~ 1976). 그는 한국의 전남 광주 출생이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는 그를 기리는 ‘인민음악가 정율성기념관’이 있다.(중국 조선족 표기로는 정률성) 정율성기념관은 하얼빈의 명동이라고 불리우는 중앙대로 끝부분 송화강변 가까이에 있다.

기념관에 들어가니 한국말 노래가 들린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유명한 미국 민요 <매기의 추억>(원제: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매기야, 우리가 젊었을 적에, 조지 W. 존슨 작사 제임스 오스틴 버터필드 작곡으로 1866년 발표된 노래)이다. 40대 이상 나이든 분들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서 모르는 이가 없는 노래다.

중국의 대음악가 기념관에 한국가사로 된 미국 노래를 종일 트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작곡가일 뿐 아니라 성악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육성으로 남아있는 노래가 한국어 가사로 된 <매기의 추억> 뿐이란다. 그래서 종일 그 노래만 트는 것이라고 했다. 목소리는 애틋한 감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또렷하고 힘이 있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감격스럽다. 중국정부에서 만든 인민음악가 기념관에 귀에 익숙한 한국말 노래가 울려퍼지니 어찌 그런 감상이 아니들 수 있겠는가?

정율성기념관을 하얼빈에 만드는 데는 하얼빈시 문화국 부국장인 조선족 서학동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던 북경의 고(故) 정율성 선생의 딸 등 유족들을 설득하고 하얼빈 당서기의 허락을 받아 2009년 7월 정율성기념관의 개관을 이끌어냈다.

나는 지난 7월 11일 안중근의사 숭모회/기념관에서 조직한 ‘안중근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의 단장으로 하얼빈에 갔다가 이곳에 처음 들렀다.

기념관을 나온 후에도 <매기의 추억>이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하얼빈에 가는 분들은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 뿐만 아니라 정율성 기념관도 한번 둘러보면서 정율성이 부르는 <매기의 추억>을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 기념관 벽면의 조선의열단에 대한 설명과 김원봉 단장 사진. 김약산 장군이라고 적혀있다.

기념관의 조선의열단 설명과 약산 김원봉 사진 

기념관에는 또한 조선의열단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국인의 사진이 한 장 있었다. 2015년 8월 15일 광복절에 1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항일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을 이끌던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김원봉은 일제 때 백범 김구보다도 더 높은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이다. 김구에 걸린 현상금은 60만원 김원봉에 걸린 현상금은 100만원이었다. 당시 100만원은 현재 기준으로 볼 때 한화 200억~300억에 달하는 금액이란다. 오사마 빈 라덴에 걸렸던 현상금 5천만 달러(한화 약540억원) 전까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현상금 이었다.

좌파 항일무장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임시정부의 광복군 부사령관으로도 활동했던 김원봉은 해방후 남한으로 들어왔다가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구와 함께 북으로 갔다가 눌러앉아 북한정권에서 노동상까지 지냈으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남한에서는 빨갱이로 여겨져 독립운동사에서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간 별로 거론되지 않다가 영화 ‘암살’ 영화 이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정율성 기념관에 김원봉의 사진이 기념관에 걸려있는 이유는 정율성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처음 중국에 건너갔을 때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간부 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율성은 중국에 간 후 미국 작가 님 웨일즈가 중국 연안에서 쓴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g)주인공인 김산도 알고 지냈다.

▲ 기념관 벽면에 일제때 정율성이 중국에 건너간 경로를 그린 지도가 그려져있다.

형들을 따라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정율성은 1918년 8월 13일 광주에서 출생(한국에서의 이름은 정부은),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형들을 따라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상해 등지에서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 1937년에는 중국공산당 본거지였던 연안의 로신(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다.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연안송(延安頌)> <팔로군 군가> 등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후 <팔로군 군가>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확정되었다.

그는 1945년 해방후 북한에 들어가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했다. 정율성은 한국전쟁중인 1950년 10월 중국으로 되돌아가 중 국 국적을 취득한 후 다시 한국(북한)에 나왔다가 이듬해인 1951년 4월 중국으로 아주 들어갔다.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간 후 가곡, 가극, 영화음악분야 등에 서 많은 업적을 남기지만 문화혁명기간(1966~1976)에는 4인방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정율성은 주은래와 모택동이 잇달아 죽고 4인방의 몰락으로 문화혁명이 끝난 해인 1976년 12월 7일 오랜만에 외손자 등을 데리고 북경 인근의 운하로 고기잡이를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중앙악단 당서기에 올라 음악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이었다. 정율성은 혁명음악가로 추앙되어 팔보산 혁명열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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