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때아닌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는 늦은 밤이었다.  캘리포니아 LA인근 오랜지 시 나의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용 부품 패널들을 샌디에이고까지 납품하고 지친 몸을 가누며 버뱅크로 귀가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5번과 134번이 만나는 지점. ‘아무리 손이 모자라도 전문기술로 생산하는 제조업체의 주인이 배달까지해서야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고 자조적인 한탄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차가 뱅그르르 돌더니 어딘가에 꽈당 부딪는 충격이 아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뿌연 시야에 경찰이 내 차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간신히 차에서 빼내져서 보니 차체는 콩크리트 벽에 두번이나 충돌해 휴지처럼 구겨져 있었다.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몸은 크게 망가지지 않아서 부축을 받으며 친절한 경찰의 차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동차 수리업체에서 폐차되는 광경을 보고 내가 살아있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싯점에서 문득 ‘덤이 아니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라는 신념을 얻어 가슴 속에 심었다.

생명은 고귀하고 꼭 지켜야 되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아주 미소한 존재들이다.  하나의 그 미소함으로 다시 보태졌다고 여겨보자. 못 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현대사회에서는 생멸을 가를 위험이 삶 가까이에 널려 있으니 살아있음은 날마다 다시 태어남과 무엇이 다르랴. 몸과 삶의 얼개는 그대로라도 걱정과 회한들은 의정 과거에 묻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매일 태어남은 매일 새로운 할 일을 맞는 격이므로 그 아니 싱그럽고 역동적인가!  아침이라도 늘 그렇게 맞고 있다.

▲ 수필가 송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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