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그룹 가운데 최초로 여성 사외이사 선임한 상장사는 16곳
내년 주총 시즌 여성 사외이사 구인난 심화할까
거수기 이사회 문화 타파해야 한다는 지적도

국내 주요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주총)과 함께 ‘여성 사외이사 선임’이 화제로 떠올랐다. 재계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하고 있는 데다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 법인이 ‘이사회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으로 구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2년 동안 유예기간을 거치고 내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데 따라서다. 해당 법안을 어겼을 경우 처벌에 관련한 규정이 명시적으로 표기된 것은 아니지만, 기업들은 지난해부터 대응에 나서고 있다.
아직 법 적용까지는 1년여 넘게 기간이 남았지만, 재계 4대 그룹은 현대차와 LG를 선두로 각 사 최초로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등 재빠르게 나서고 있다. 4대 그룹에서 올해 주총 시즌에 사상 최초로 여성 사외이사를 신규 선임한 상장사만 16곳이다. 전문가들은 내년 주총 시즌에는 더 많은 기업에서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여성이사 선임 의무화라는 제도를 통해 지배구조를 개선한다는 것이 법 제정 취지인 만큼 거수기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이번 주총 시즌에 ‘여성 사외이사 선임’을 키워드로 눈 도장을 찍은 곳은 현대차와 LG다. 현대차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현대건설, 현대글로비스 등 6개 상장사에서 최초로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LG는 지주사인 (주)LG와 LG전자, LG유플러스, LG하우시스, 지투알까지 5개 사가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현대차와 LG 주요 상장사들은 그간 이사회 내에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한 전력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과 SK, 롯데는 이미 주요 상장사에 여성 사외이사를 두고 있었던 만큼, 신규 선임 상장사가 크게 늘지는 않았다. 삼성은 기존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한 곳이 9개사에서 이번에 삼성생명까지 포함해 10개사가 됐고, SK는 3개사에서 SK(주), SK네트웍스, SK 렌터카, SKC 등까지 포함해 7개사로 늘었다.
재계 4대그룹 여성 사외이사들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교수에 대한 재계 선호가 뚜렷하다. 롯데까지 범위를 넓혀 5대 그룹 여성 사외이사 현황을 살펴보면, 30개 상장사에 여성 사외이사 29명 가운데 21명이 학계 출신으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특히 법조와 경영‧회계, 공학 분야에서 전문성이 있는 교수에 대한 재계의 선호도가 높았다. 다만 그룹마다 선호하는 여성 사외이사 이력과 전문 분야는 사뭇 달랐다. 삼성의 경우, 서울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주로 발탁했고 특히 지배구조와 경영체계에 관련해 조언할 수 있는 법과 경영‧회계에서 전문성있는 여성 사외이사를 기용해왔다.
현대차가 이번에 대거 발탁한 여성 사외이사들은 대부분 공학 분야 전문가들이다. 현대차는 항공우주분야 전문가인 이지윤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부교수를 후보로 선임, 현대건설은 한국로봇학회 수석부회장인 조혜경 한성대 IT 융합공학부 교수를 후보에 올렸다. 그룹 주력 계열사인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여성 사외이사 후보를 선임한 모양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그룹 주력사인 현대차를 중심으로 현대차그룹 비전에 맞게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것이고, 현대차가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로봇 등을 미래 먹거리로 두고 있어 각 사마다 가장 접목이 잘 될 법한 분야에 역점을 둔 사외이사를 선임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학계 출신이 아닌 ‘CEO’를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한 그룹도 있다. SK그룹 지주사인 SK(주)는 김선희 매일유업 대표이사 사장을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했다. 김선희 사장은 지난 2014년 매일유업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현직 CEO로, 국내 우유 가공업계 최초 여성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하다. SK는 김 사장으로부터 신사업 발굴, 회사 소통능력 강화 등에서 자문을 구할 계획이다. LG그룹 지주사인 (주)LG 역시 경영 경험이 있는 여성을 사외이사 후보에 올렸다. (주)LG는 이수영 전 코오롱에코원 대표이사를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했다. 이 전 대표이사는 코오롱그룹 최초 여성 CEO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두 기업에서 사외이사로 재직하며 유독 몸이 바쁘게 된 후보들도 있다. 현대모비스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된 강진아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 교수는 OCI 사외이사를 겸한다. 현대글로비스 사외이사 후보인 윤윤진 카이스트 건설환경공학 부교수는 국토교통부 산하 준정부기관인 국토안전관리원에 비상임이사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투알 사외이사 후보 최세정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지난해 카카오 사외이사에 선임됐다.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조현욱 변호사는 삼성과 롯데 계열사 두 곳에서 동시에 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조 변호사는 지난해 삼성중공업 사외이사로 선임됐고, 이번에는 롯데칠성음료 사외이사 후보로 발탁됐다.
롯데칠성음료는 조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동시에,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승진한 송효진 상무보를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올려 이사회 내 여성 멤버가 2명이 될 예정이다. 롯데는 롯데칠성음료를 포함해 롯데쇼핑, 롯데케미칼 등 3개 상장사에 여성 사외이사를 두고 있다. 세 기업 모두 이번 주총에서 신규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안건을 올리며 여성 사외이사 ‘1명’이라는 수를 유지하게 됐다.
재계 5대 그룹뿐만이 아니다. 최근 CEO스코어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4대 대기업집단 267개 상장사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여성 사외이사를 후보로 올린 곳만 30곳이 넘는다. 이번 주총에서 여성 사외이사를 후보로 올린 곳은 총 46곳으로 집계됐다. 여성 사외이사 후보는 총 51명, 이 가운데 재선임 8명을 제외한 43명이 새로 이름을 올렸다. 전체 여성 사외이사 수도 42명에서 최대 80명 수준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전체 사외이사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존 4.7%에서 8.8%까지 높아지게 된다.
자본시장법 개정안 시행을 코앞에 두게 되는 내년 주총 시즌에는 더 많은 기업들이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에 벌써부터 기업들이 여성 사외이사 후보를 물색하는 데 난항을 겪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복실 세계여성이사협회 이사장(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구인난까지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특정한 분야에서 특정한 경력을 가진 사외이사 후보를 원하는 것이 아닌 기업마다 원하는 사외이사 후보상이 다르고, 여성 사외이사를 반드시 선임해야 하는 기업 수도 200곳 정도(2020년 기준 금융사 40곳, 비금융사 171곳으로 총 211개사) 뿐이기 때문이다.
이복실 이사장은 “기업에서 사외이사 후보로 원하는 인재는 현장과 학계, 법조, 재무회계, 마케팅, 위기관리 등 다양하게 퍼져있다”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되는 기업이 200곳이 채 되지 않고 올해 기준으로 50곳은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한 상황이라 구인난이 벌어질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이사장은 자본시장법 개정안 시행에 발 맞춰 대기업에서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흐름이 경제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봤다. 그는 “최근 한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는 기업이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고 싶다며 추천을 의뢰했고, 실제로 한 분을 사외이사로 기용하는 사례가 있었다”며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독 여성의 이사회 진입이 드물었던 금융권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 지 주목된다. 많은 여성 근로자가 근무하는 데다 최근 ESG를 경영 화두로 강조하고 있지만, 금융사들은 줄곧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왔다. 금융지주와 은행, 보험사, 증권사 가운데 이사회 내에 여성이 있는 곳은 찾기 드물다. 4대 금융지주만 놓고 봐도 KB‧신한‧하나금융지주는 여성 사외이사를 1~2명씩 두고 있지만, 우리금융지주는 2019년 지주사 출범 이래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한 적이 없다. 지방 금융지주 3사인 BNK금융지주, DGB금융지주, JB금융지주 등도 이번 주총에서 기존 사외이사를 재선임하거나 남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며 여성 사외이사가 전무하다.
경제개혁연대 소장인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명시적인 처벌과 같은 강제성이 없는 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여성 사외이사를 흔쾌히 선임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한다는 것은 이 인물들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라며 “거수기로 상징되는 이사회 문화에서 성별에 관계없이 ‘YES’가 아닌 ‘NO’를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또 “여성 사외이사들이 여성계 대표로서 기업 이사회에 들어가는 만큼, 회사 내 성차별 타파와 다양성 강구 등 문제의식을 갖고 발언해야 하고, 국민연금은 여성 사외이사의 역할과 이사회 독립성을 모니터링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