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양보호사 6년 차에 접어든 70 초반 남자입니다. 제가 이 직업을 택하려고 했을 때 "그거 힘들어서 못 해. 3개월도 어렵대." 하며 반대한 친구도 있습니다. 저는 속으로 ‘참 내 인생 말년이 똥이다. 똥. 똥이라고? 말년에 똥이나 만지며 살라고? 그럼 이 직업이 딱 이네. 그래 한 번 해보자.’ 결심했습니다.저도 한때는 잘나가던 건설 회사 대표였습니다. 아버지가 계셨지만요. IMF 때 쫄딱 망했습니다. 모든 재산 다 내놓아도 모자라 저는 도망갔습니다. 아버지만 믿고요. 6개월 숨어지내다 우연히 만난 친구와 식당에 가다 불심
장롱 속에 잠자던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10여 년이 지난 후 햇빛을 보게 했다. 이웃 지인이 93세 되신 시어머님과 따로 살았는데 병환으로 입원하셨다가 집으로 모셔 오게 되었다고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며느님의 걱정이 대단하길래 내가 돌봐드리겠다고 자원했더니 정말 도와줄 수 있겠냐고 요양 보호사 자격증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다음날부터 찾아가서 어르신 말동무도 해드리고 식사와 간식도 챙겨 드리고 손주가 가지고 놀던 블록과 빙고 게임기를 가지고 가서 게임도 하고 이미자 동백 아가씨를 좋아하셔서 태블릿을 가지고 가서 유튜브로 찾아 노래를 들
불청객 치매의 습격엄마는 하나님 덕후다. 아버지는 평생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신 평범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시각장애인 엄마와 함께 우리 4남매를 지극정성으로 키워내셨다. 여든이 넘으신 두 분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치매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큰딸인 내가 제일 먼저 감지하고 동생들은 ‘누나. 언니가 예민한 거 아니야?’라며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검사를 하고 두 분 모두 치매 진단을 받았다. 예민한 큰딸 때문에 초기에 진단받으셔서 치매약을 드시며 그나마 일상생활을 하시는 것이 다행이면 다행이라 하겠다. 엄마는 내가 집에서 방문 요양
작년 코로나 때 난 친정엄마로부터 요양 보호사 자격증이 실습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얼떨결에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 후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이번 년도 5월부터 갑자기 쉬게 되면서 뭘 다시 해볼까 하다가 작년에 따둔 자격증이 생각이 났다.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재가센터를 찾았을 때 날 보고 놀라시는 센터장님 왈 “선생님 몇 살이세요?” 그때 내 나이 47살 요양 보호사 치고는 아주 젊다면서 일 하실 수 있겠냐는 물음과 함께 “한번 해 보는 거죠. 뭐”하고 무작정 어르신을 맡게 되었다.어르신은 91살이시고 아드님과 거주
야간 근무를 하러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내가 근무하는 4층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달랐다. 팀장님을 비롯한 요양 보호사들은 분명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몹시 지쳐 보였고 시선 처리도 불안정해 보였으며 몇 마디 말을 건네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날의 현장 모습이었다.넋이 반은 나갔다는 것은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뭔지 모를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고 분명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나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침묵의 시간은 주간 팀과 야간 팀의 인수인계 과정에서 서서히 커튼이 열리고 있었다.“그 짧은 시간에 이OO 어르신을 살리려고
저는 23명의 어르신을 모신 요양원에 근무하고 있는 요양사입니다. 1, 2층으로 구분되어 아래층은 중증의 남녀 열세 분 어르신과 위층은 열 분의 여자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저는 1층 소속으로 1등급 와상 어르신이 네 분이시고 거의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치매 어르신들을 돌봐드리고 있습니다.근무 일상은 9시 출근 9시 퇴근입니다. 출근해서 거실에 나와계시는 어르신들과 눈 맞추며 인사드리고 회의 겸 인수인계를 마친 후 방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시작으로 일과가 시작되지요. 오전에는 와상어르신들의 기저귀 케어와 석션(가래)을 해드리고 소변을
요양 부분 중에서도 재가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일은 자격증 따기 전부터 봉사활동을 여러 군데 다녔습니다. 자격증 1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두 분 다 중증을 케어 하고 있고 한 곳은 2년 다른 한 곳은 2년이 넘었네요.한 분은 남자 어르신이시고 성격이 아주 급하고 괴팍하세요. 다른 선생님은 두세 달을 못 버티고 가십니다. 저도 처음에는 힘들어서 그만둘까 많이 생각도 했지만 시설에서 많은 분들을 케어해 본 적이 많아서 어르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요.요즘 자주 용변 실수를 하셔서 하루에 이틀꼴로 어르신 씻겨드리고 옷 갈아입히느라
나는 아기 없이 한 달 동안 몸조리를 해야 했다. 어머님께서는 24시간을 6시간씩 4회로 산모의 밥상을 준비해 주셨다. 시계 같이 정확하게 준비된 어머님의 산모 식사는 새벽 5시, 오전 11시, 오후 5시, 저녁 11시였다. 산모는 체력 소모가 더 많았기에 한 끼를 더 먹어야 한다면서 하루 네 끼를 챙겨 주셨다.어김없이 새벽 5시에 차려 내어 주시는 밥을 받을 때 잠에서 깨어나기 싫은 적이 있었지만 어머님의 새벽 손수 지어 주시는 나만의 1인 돌솥밥, 정성을 모르지 않기에 눈을 번쩍 뜨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동하며 먹었다.무려 한 달
밤 11시가 조금 지나자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어르신들의 잠자리도 확인하고 기력이 저하된 특별대상 어르신들의 안색과 숨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마다 현미경이 되어 꼼꼼히 체크하며 라운딩한다.서쪽 생활실 끝 방으로 향하자 작은 기척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입구에 들어서자 정 어르신이 침상에 앉아 침상 아래로 떨어진 베개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허리가 굽고 다리 구축이 심해 자칫 침상 아래로 낙상할 위험이 크다.나는 반사적으로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속하게 어르신을 챙겨 드리면서 베개를 침상에 살며시 놓으며 안심시켜 드렸다
나는 어린아이인 채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뒤뚱거리며 걷는다. 온몸에 한기가 도는데도 얇은 옷을 입고서 산길을 헤매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엄마! 엄마!"순간 눈앞에 보이는 작고 조그마한 웅덩이.상처 난 무릎을 꿇고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나자빠진다.거기에는 백발의 할머니인 또 다른 내가 쪼그려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꿈이었을까.꿈이었다면 다시 없을 악몽이었다.나는 대한민국의 요양 보호사다.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갖기 전, 무언가 보람된 일을 해보라던 딸의 권유로 사회 복지사를 먼저 땄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이 인사를 시작으로 오전 회의를 마치면 본격적인 요양보호사의 하루가 시작된다. 100인 정원 요양원의 아침은 늘 분주하다. 어르신 생활실 청소와 목욕 돕기, 기저귀 케어 및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개별 욕구에 맞는 신체활동 및 일상생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면 어느덧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노동자는 사회의 소금이라 했던가? 그 이유를 알겠다. 얼마나 땀을 흘리는지 말도 못 한다.나는 돌봄서비스 직업군 안에서 조금 특이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십 대 초반의 요양 보호사다. 10년 동안 전자부품을 유통하
보호자분,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예. 배우자입니다."나는 88세의 남편을 돌보는 가족 요양 보호사이다. 80세에 대장정을 시작한 모세를 롤모델로 삼고 있던 남편은 80부터가 진짜 인생의 길이라고 했던가. 그런 그가 82세가 되어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뒤 평생을 즐기고 붙잡았던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매일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 처리로 바쁘던 남편은 시간이 흘러 흘러 요즘은 습관적으로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몇몇 지인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열심히 알려주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이다. 이메일을 열어야 할지 카톡을 열어야
어느 집 뜰 앞에, 소박하게 피어있는 치자꽃을 보면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센터 소장님을 따라 시내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시골 깊은 곳에서 처음 할머니를 뵈었다. 아흔셋의 할머니는 가녀린 몸매에 하얗게 센 쪽진 머리를 하시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셨다.넓은 마당과 큰집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서 살아오시다 둘째 딸과 막내아들을 한 해에 다 보내고 병드셨다. 그래서 인연이 되어 할머니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요양보호사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자기 집에 오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고 그냥 아들이 모시지 못하는
"이년들아 누가 시켜서 나를 여기다 가둔 게냐? 너희는 애미 애비도 없냐? 최OO이 시켰냐? 너희들은 다 한통속이냐? 천벌을 받을 년들아. 고만 죽어야지 죽는 약 가져와라."아침 식사 케어가 끝나갈 무렵 며칠 전 새로 입소하신 정 어르신의 노여움이 폭발한다. 본인의 억울함과 노여움으로 한껏 고조된 그녀의 괴성과 욕지거리들이 가을의 시작과 함께 나뒹군다. 나가시겠다고 발버둥을 치시는 통에 어르신에게 팔이 잡혔다. 내 팔뚝엔 선명한 어르신의 손톱자국이 아로새겨졌다.그러고도 한참을 정 어르신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어르고 달래고 정서 지원
30 대 말에 전문가가 되어 아프신 부모님을 모시고자 하는 바램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공부가 직업이 되어 버린 지 벌써 13년차 입니다. 그 동안 많은 어르신과 인연을 맺었고 그 분들의 삶과 함께하며 인생을 배우기도 하고 이별이란 영원한 것에 대해 조금씩 단단해져 가고있는 나입니다.재작년 10월 말,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출근한 나를 기다리는 어르신 방 앞의 선물보따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함께 지내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울컥했습니다. 101살의 연세에도 늘 기다려주시는 어르신께 떨리는 목소리로 "어르신 선물이
아침 7시 30분, 집을 나선다. 50분쯤 걸으면 근무처인 해피요양원에 도착한다. 용인시 기흥구에 소재하는 18명의 어르신을 돌보는 소규모 요양원이다. 전 직장 퇴직 후 9년 만에 65세에 재취업한 직장이다. 요양보호사 자격 취득 후 입사한 지 5개월 차로, 수습 기간 3개월이 지났건만 업무에 숙달되지 않은 초짜다 보니 한참 동안 아침 출근 때 요양원 건물 로비에 들어설 때면 부담감으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요양원 하루 부부출근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즈음의 일이다. 80대 후반의 치매 여성 어르신이 계신 2인실 옆 침대에 90
시간은 정말 쏘아 올린 화살처럼 빨리 가고, 코로나19라는 괴물 때문에 엄마 면회도 안 되다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2m나 떨어져 얼굴만 바라볼 수 있는 면회가 허락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지난달 둘째 동생이 엄마를 보고 싶어 2주간 자가격리를 감수하고 남미에서 날아왔다. 엄마는 그토록 보고 싶던 아들과 마주 서자 너무 좋아하시고, 언제 손이라도 잡을 수 있느냐고 안타까워했다.둘째 동생과 나와 큰동생이 같이 면회하러 갔을 때는 엄마가 무척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둘째는 남미로 돌아가기 전까지 엄마 면회를 갔다. 그리고 백신이
엄마에게 요양원에 가자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요양원 이야기만 나오면 포악해지고 치매 증상이 악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건강도 엄마의 건강도 엄마가 요양원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 그동안 동생은 바쁜 와중에도 엄마가 지내기에 좋은 요양원을 찾아 다녔다.“엄마, 진안이 어딘지 알지요? 내가 가봤는데 요양원이 아주 좋아요. 봄이면 산나물도 뜯을 수 있고, 엄마가 좋아하는 농사지을 땅도 있어요.”동생이 설득하려 했지만 엄마는 화를 내며 돌아앉아 쏘아붙였다.“그렇게 좋으면 네가 가서 살아. 난 안 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간병 살인 뉴스를 접했다. 뉴스에 알려지지 않은 동반자살이나 간병 살인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에도 유명 가수의 아버지가 치매 간병에 지쳐서 간병 살인을 하고 자살한 사례가 있었다.간병 살인은 계획적 살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겪은 것을 보면 우발적인 것이 많다고 본다. 간병 가족이 오랫동안 간병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빠지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각만 할 수가 없다.어느 순간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 특히 치매 시간이 나타난 치매 환자와 간병인의 욱한 감정이 부딪치면 그 순간 간병
기저귀를 입고 음식을 입에 넣어주어야 하고 몸도 닦아줘야 하는 엄마. 엄마는 나이 먹은 아기였다. 엄마의 숟가락은 이제 손잡이가 노란 유치원생용 작은 숟가락이다.“왜 밥을 가득 떠? 절반만 줘야지.”“엄마, 이 숟가락 유치원 애들이 쓰는 건데 이 정도도 입이 안 열려요?”“그래, 조금씩만 줘. 넌 날 왜 먹여 죽이려고 하냐?”반찬도 고루 드렸지만 거부하는 반찬이 많았다. 조금만 질기거나 식감이 맘에 안 들면 바닥에 바로 뱉었다.“엄마, 뱉고 싶으면 여기 펴 놓은 휴지에다 해요.”“귀찮아. 네가 치워.”“엄마, 이 반찬 한 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