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해미백일장 변부경 님 입상작

야간 근무를 하러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내가 근무하는 4층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달랐다. 사진은 AI에 의해 제작된 요양보호사 이미지 /Chat GPT 4.0

야간 근무를 하러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내가 근무하는 4층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달랐다. 팀장님을 비롯한 요양 보호사들은 분명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몹시 지쳐 보였고 시선 처리도 불안정해 보였으며 몇 마디 말을 건네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날의 현장 모습이었다.

넋이 반은 나갔다는 것은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뭔지 모를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고 분명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나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침묵의 시간은 주간 팀과 야간 팀의 인수인계 과정에서 서서히 커튼이 열리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OO 어르신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고 선생님들께서도 애써주시고 최선을 다하신 것을 압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팀장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제외한 그날의 모든 주간 근무 선생님들은 울고 계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난 눈물은 나지 않고 가슴은 답답하면서 그저 멍할 뿐이었고 주간 팀과의 인수인계 후 야간 근무 반나절 사이 입안은 심하게 헐어 있었고 4시간 동안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이는 사이에도 가위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다 일어나서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서둘러 움직이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과 어르신들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누구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이정표가 분명한 예정된 종착역에 난 저승사자로서의 길라잡이가 된 승무원이었고 어르신들을 보내드릴 때 마다 찾아오는 자괴감은 그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었다.

요양 보호사로서 1년 동안 삶의 경계에 매번 서 있는 느낌이 들었고 결국 이직을 고려할 만큼의 생채기가 남아버렸다. 퇴사 후 쉬는 동안 제일 먼저 내가 한 것은 더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사인을 한 것이었다. 친한 동료는 말한다. 편안하고 좋은 경력직 직업을 두고 왜 피소 당할 수도 있는 이 일을 하느냐고···.

아직도 난 나에게조차 답을 주지 못했다. 몸과 정신을 추스르고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시작된 6개월의 여정 동안 또 다시 몇 분의 어르신들과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모른다. 부모를 잃은 보호자들 만큼 이나 우리 요양 보호사들도 아프다는 사실을. 이OO 어르신이 떠나시던 날도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시설이나 요양 보호사에게 갈채가 아닌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요양 보호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정부에서 제시한 열악한 가이드라인은 보편적 근무 환경도 아닌 길이 끝난 걸 알면서도 더 이상 멈출 수도 더는 나아갈 수도 없는 낭떠러지 현장으로 요양 보호사들을 점점 더 내몰아 버렸고 겨우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저임금 보수는 얼마 전 무더위에 착용한 방호복만큼이나 틈이 없어 그들의 삶을 또 한 번 외롭고 지치게 했다.

요양보호사의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어르신 케어에 집중할 수 있다. /변부경
요양보호사의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어르신 케어에 집중할 수 있다. /변부경

요양보호사의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어르신 케어에 집중할 수가 있고 그래야 질 높은 서비스가 제공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에서는 예산집행의 어려움 때문에 또는 그 어떤 이해관계 속 당사자 간의 당위성 때문에 최소한의 권리와 인권마저 아니 관리 감독마저 등한시하며 요양 보호사와 어르신, 보호자를 사지로 내몰아 버린다.

편견에 갇힌 사람들과 아프신 어르신들은 말한다. 똥 치우는 아줌마 도둑년! 최근 요양원에서의 하루는 중증 치매 어르신들에게 맞으며 일과가 시작되고 또다시 맞아야 끝이 난다.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언어폭력과 물리적인 폭력, 과중한 업무는 기저귀 케어 할때나 목욕 케어시 최소한의 방어나 권리조차 표현할 수 없는 요양보호사의 현실은 너무나도 슬프다.

5개월 남짓 나의 왼쪽 손목과 왼쪽 발목은 보호대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입사 후 5개월 함께 해주셨던 이OO 어르신의 첫 모습을 기억한다. 집에 가시겠다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시다가 내가 야간 근무하러 내리는 순간 머리채와 목덜미를 잡혀 1주일 내내 심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피 통증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도 미워할 수 없었던 어르신.

“이봐요. 난 영등포 사는데 내가 집 돌아가면 꼭 한 번 찾아와요. 대신 꼭 쌀은 가지고 와요. 오면 잠도 재워주고 맛난 반찬도 해줄게. 그리고 나 빨리 아들에게 연락해서 집 가게 해줘요, 여기 하루 자는데 얼마야? 우리 아들이 돈 내야 하지? 나 일 거리 좀 줘. 우리 아들한테 돈 받지 말고.”

“어르신 여기 돈 안 받아요. 걱정 마세요. 그런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잠도 재워주고 맛난 반찬도 다 해주신다면서 저보고는 늘 쌀은 꼭 가져오라 하세요?”

“그래야 자주 올 거 아냐? 쌀 가져와야 덜 미안할거 아니냐고.”

시간은 삶을 재단하듯 칼같이 어르신을 모셔갔다. 얼마 전부터 어르신 목에 걸려 있는 아파트 카드키는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미들의 회귀본능이었을까? 본능적으로 어르신들의 안식처는 그들이 마지막에 머물렀던 잠시나마 건강한 기억이 존재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으셨을 작은 소망 하나였음을 나는 알 것 같다.

“어르신 세수 시켜드릴게요. 저 오늘 어르신 아침 드리고 저녁에 올 거예요. 식사 잘하시고 약 꼭 드시고 저녁에 만나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의 따뜻한 시선과 합당한 보수, 가족들도 하지 못하는 똥 치우는 일을 내 친정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도 못 해 드렸던 그 일을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의 이웃이 내 아내가, 내 누이가 그곳에서 생존 게임하듯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그들의 이름은 요양 보호사다.

<해미: 바다에 낀 짙은 안개>는 어르신의 기억만이 아닌 사람들의 눈과 귀도 흐리게 하나보다. 오늘도 난 요양 보호사로서 그 현장에 가 있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글이 저와 대한민국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시는 요양 보호사님들과 이OO 어르신, 김OO 어르신 외 그 가족분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시길 소망하며 글을 남긴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그들도 아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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