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계획없다" 기자단 공지···여가부 발표 정면 반박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 평등정책 기본계획 발표를 위해 브리핑실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 평등정책 기본계획 발표를 위해 브리핑실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간음죄 신설 계획을 9시간 만에 철회했지만, 정치권 논란으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폭행과 협박 없이도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라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비동의 간음죄는 여성계에서 꾸준히 도입을 요구해 온 정책이지만 이른바 ‘이대남’(20대 남성)들이 강하게 반발해 온 사안이다. 

여가부는 26일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하면서 법무부와 함께 형법상 강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해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여가부 브리핑에 배석한 법무부 관계자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 배경과 취지를 묻는 기자 질문에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고, 여가부는 여성정책국장이 답변을 맡았다. 

동의 여부로 성폭행을 판단하자는 논의는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을 계기로 활발히 진행됐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보수 정당 소속 의원들도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나선 바 있다. 미래통합당의 나경원·홍철호·송희경 전 의원이 각각 비동의 간음죄 법안 3건을 대표로 발의했고, 22명의 같은 당 의원들이 이에 동참한 바 있다. 

나 전 의원은 2018년 8월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위한 국회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입법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법무부 장관 경력의 천정배 전 국민의당 대표도 20대 국회에서 입법을 추진한 바 있다.

아울러 세계 여러 국가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해 성범죄에 대처하고 있다. 영국은 2003년 성범죄법을 개정해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고, 그것을 알면서 간음한 사람을 강간죄로 처벌하도록 했다. 다만 상대방의 동의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면 제반 사정을 고려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2016년 11월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한 독일은 형법 177조에 따라 ‘타인의 인식 가능한 의사’에 반해 간음을 한 사람을 강간죄로 처벌한다. ‘인식이 가능한 의사’에 반한 경우만 처벌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의사표현 없이 마음속으로만 성관계를 동의하지 않은 경우에는 처벌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오후 법무부는 출입기자단에 “비동의 간음죄 개정 계획이 없다”고 공지하면서 여가부 입장을 정면 반박했다. 법무부는 여가부의 비동의 간음죄 신설 논의와 관련해, “‘성범죄의 근본 체계에 관한 문제이므로 사회 각층의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반대 취지의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날 저녁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법(비동의 간음죄 처벌)이 도입되면 합의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특히 동의 여부를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냐”고 여가부 발표 내용을 비판했다. 

이어 “무엇보다 비동의 간음죄는 성관계 시 ‘예’, ‘아니오’라는 의사표시도 제대로 못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성인남녀를 평가절하한다”며 “이와 같은 일부 정치인의 왜곡된 훈육 의식이야말로 남녀갈등을 과열시킨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윤석열 정부가 여가부 폐지를 공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도 했다. 

‘이대남’ 입당 러시를 주도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역시 “뭐?비동간?”이라며 이를 비판하는 취지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정부 내부와 정치권의 비판이 나오자 여가부는 이날 저녁 기자단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발표 내용을 뒤집었다. 브리핑 후 9시간 만이었다. 여가부는 “제3차 기본계획에 포함된 비동의 간음죄 개정 검토와 관련해 정부는 개정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린다”고 공지했다. 그러면서 “이 과제는 2015년 제1차 양성평등 기본계획부터 포함돼 논의돼온 과제로, 윤석열 정부에서 새롭게 검토되거나 추진되는 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3·8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진 조경태 의원과 장예찬 청년재단 이사장은 27일 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간음죄를 발표했다가 철회한 것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국민의힘 당권주자인 조경태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을 계기로 나는 여가부와 일부 페미(페미니스트)들은 독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졌고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집단이라고 더 확신한다”며 “어차피 폐지되었어야 할 여가부가 문재인 정권에서 활개를 치더니 아직도 우리나라를 북한과 같은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국민의힘 청년 최고위원 후보인 장예찬 청년재단 이사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가부의 일방적 비동의 간음법 추진 계획을 법무부가 막아섰고, 권성동 전 원내대표도 대선 공약을 상기시키며 여가부가 만들어낸 정책 혼선을 진화하는 데 앞장섰다”며 “청년 최고위원이 돼 제2의 비동의 간음죄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 무고죄 처벌 강화와 촉법소년 연령 하향 공약을 만든 당사자로서 여가부가 민심과 동떨어진 사고를 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는 지도부가 되겠다”고 했다.

한편 20대 국회에서 비동의 강간죄를 대표 발의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2021년 제47차 유엔(UN) 인권이사회가 채택한 보고서는 피해자가 강간의 과정에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였거나 '저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였던 경우에만 처벌하라는 한국의 형법 개정을 권고했다"라며 "국제 표준이 된 이 제도의 도입을 대한민국에서 말하면 위험하다.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면 무고한 남성의 인생을 망치는 '꽃뱀'이 늘어난다는 (일부 남성의) 판타지 때문이며 그 판타지를 믿는 일부 남성들의 키보드를 대변한 정치인이 실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이어 류 의원은 "흠씬 두들겨 맞아야만 강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낡은 형법이 이제 지긋지긋하다"라며 "동의하지 않았을 때 관계를 강제당한 성적자기결정권 침해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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