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권의 세상을 읽는 안목]
부산 엘코델타시티 '에코델타동'
외래어 지명은 역사성 지우는 꼴
한국 고유한 전통·문화 보존해야

부산 에코델타시티 부지 /연합뉴스
부산 에코델타시티 부지 /연합뉴스

최근 부산 강서구가 강동동·명지동·대저2동에 걸쳐 조성하는 신도시인 '에코델타시티'의 새 법정동 이름을 '에코델타동'으로 선정했다. '에코델타시티'는 2012년부터 부산시 등이 2028년까지 3만 가구 규모로 조성 중인 친환경 스마트 신도시로 환경을 뜻하는 에코(eco)와 낙동강 삼각주를 뜻하는 델타(delta)를 합성한 이름이다.

'에코델타동'은 주민 선호도 조사를 통해 정한 명칭이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강서구의회도 '에코델타동'은 역사성도 없고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약 '에코델타동'이 확정될 경우 전국 최초의 외래어 법정동이 된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지명을 허투루 짓지 않았다. 동·읍·면·산의 이름에도 역사성과 문화성이 내포돼 있다. 지명을 보면 과거 이 지역의 어느 시점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지명만 봐도 그곳이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오래도록 잊히지 않게 지켜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미래세대를 위한 살아있는 교육의 표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모든 지자체에서도 마을이나 동(洞)의 지명 유래를 중요한 자료로 여기고 홈페이지에 게시하거나 사료들을 보관하고 있다.

'인월면(引月面)'은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의 역사가 담긴 지명이다. /KBS 드라마 '정도전'의 황산대첩 장면
'인월면(引月面)'은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리의 역사가 담긴 지명이다. /KBS 드라마 '정도전'의 황산대첩 장면

예를 들어 남원시 '인월면(引月面)'은 고려 우왕 시절인 1380년,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달(月)을 끌어(引) 올려 왜구를 물리치고 승전한 역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전북 임실군의 '오수면(獒樹面)'은 고려시대 <보한집(補閑集)>과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전해지는 지명 유래다. 주인이 술에 취해 들판에 잠든 사이 들불이 일어나자, 개가 자기 몸에 강물을 적셔 번지는 불 위를 뒹굴기를 반복하다 불을 끄고 결국 죽었다고 전한다. 술에서 깬 주인이 죽어있는 개의 모습을 보고 노래를 지어 슬픔을 표하고 봉분을 만들어 묻어 주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했더니, 그 지팡이가 잎이 피는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개 오/나무 수)로 지은 것이다. 충성스러운 개를 추모한 지명이다. 사람과 개의 아름다운 유대관계가 지명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서울시 서초구의 '우면산(牛眠山)'은 산의 형상이 '소가 누워 되새김질하는 모습처럼 생긴 모습'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우면산을 보면 소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생겼다. 전남 신안군의 '복호리(伏虎里)'는 뒷산 모양이 엎드린 범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산 이름을 지을 때도 자연이나 동물에 결부시켜 환경친화적인 작명을 한 것이다. 산을 무기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만약 지명을 '에코델타동'처럼 외래어로 바꾸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 현장은 점점 말살될 것이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역사 사료를 우리 스스로 지우는 꼴이다. 기준과 개념도 없이 지명을 영어로 짓는 행위는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창씨개명과 비슷한 일이다. 아무리 영어가 세계 표준어로 쓰인다고 해도 우리의 혼과 역사마저 무색시킬 필요는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한글이라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언어가 있는데 굳이 지명에까지 어려운 영어 표기를 할 이유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도로명으로 전국의 주소를 바꾼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고유의 전통과 역사성을 지닌 동과 마을 이름 대신 근본도 없고 뿌리도 없는 도로명을 도입해 혼란을 초래하고 역사교육의 장이 사라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결국 지명에 깃든 역사는 도서관에 찾아가야 알 수 있는 기록으로 남아 먼지만 쌓일 것이다. 아무리 글로벌시대에 살아도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성까지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항상 자기 뿌리와 정체성을 지키면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에코델타동'은 취지가 너무나 빈약한 명칭이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한글을 놔두고 영어로 동(洞) 이름을 짓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영어로 동 이름을 지으면 뭔가 특별한 우월감이라도 느끼는지, 아니면 무슨 효과가 있는지 궁금하다. 동의 명칭을 영어로 바꾼다고 해서 과연 영어권 사람들이 반길까? 오히려 의아해할 것이다.

만약 '지리산(智異山)'을 '사우스 마운틴(South Mountain)'으로 바꾼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순히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될 뿐이다. 심오한 지리산의 이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단순히 방향만 가리키는 이름으로 전락하게 된다.

더욱이 지금은 나라마다 자국의 문화가 중요한 시대다. 문화가 돈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른 나라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보고 싶어 해외여행을 간다.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방문해 한국의 K푸드, K컬처를 보고 싶어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홍보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명을 외국어로 짓는 행위는 근시안적이고 위험한 탁상공론이다.

백재권 사이버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

어렸을 때부터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명상과 기(氣) 수련에 매진했다. 대구한의대학교 풍수지리학 석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 박사를 취득했고, 교육학 박사를 수료했다. 중앙일보에 2년간 《백재권의 관상·풍수》를 연재했고, 네이버 오디오클립에 《백재권의 관상과 지혜》를 92회 연재했다. 2018년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신문사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의 요청으로 김정은의 관상에 대해 인터뷰했다. KBS, SBS, 채널A, MBN, 동아일보, 한국일보, 연합뉴스 등 다수 언론과 신문에 관상·풍수 전문가로서 출연 및 기고했다. 저서로는 <동물관상으로 사람의 운명을 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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