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뒤안길' 시리즈 두번째 이야기

▲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장례식때 다른형제들과 함께 조문객을 맞고있는 4남 이태휘(맨우측). 원안은 이태휘. / 여성경제신문 자료사진.

1986년 2월, 삼성그룹 창업주 고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은 자신의 과거 발자취를 담담히 술회 하듯 기술한 ‘호암자전’을 세상에 내보였다.

당시 위암 투병중이면서 희수의 고령이었던 노회장은 그로부터 1년 뒤 작고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꼭’ 남기고 싶은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후손들은 그의 유지를 어느 정도 받들고 있을까?

호암자전 속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사업인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계기와 과정, ‘삼성’을 일구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또 당시 사회상, 사업에 대한 호암의 혜안과 배포, 기업인의 자세 등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개인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감추고 싶은 부분까지도 비교적 여과없이 밝히고 있다.

이병철 회장이 밝힌 사회상 중에는 당시엔 일반적이었지만, 오늘날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다. 바로 ‘조혼’ 풍습과 ‘혼외자’에 관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이다.

이 회장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 3남 5녀의 자녀를 본문에 수록하고 별도로 1남 1녀의 자녀 탄생을 기록했다. 모두 4남 6녀인 셈이다. 혹자는 이 회장 부부의 친 핏줄은 3남 4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논란을 예상했으면서도 왜 이병철 회장은 개인사의 ‘공식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서전에 ‘비서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수록케 했을까?

이병철 회장은 중동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선친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일화에 대해 소개했다. 바로 훗날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그룹의 ‘장충동 왕할머니’로 통하던 고 박두을 여사와의 혼인에 관한 것이었다.

“1926년 3학년이 된 가을에 선친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너의 혼담이 이루어져, 12월 5일(음력)에 식을 올리게 되었으니 집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조혼이 관행이었다. 나의 학급에도 기혼자가 꽤 많았는데 그들 중에는 ‘처가 마음에 안드니까 이번 방학때 집에 돌아가면 꼭 이혼해야겠어’하고 용감하게 떠드는 친구도 있었다.”(호암자전 중)

당시 이병철 회장의 나이 16세때 이야기다.

이어서 이 회장은 결혼전까지 얼굴도 보지 못한 신부 박두을 여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신부는 같은 경상도 달성군 묘동에 사는,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박씨 기동공의 4녀였다. 식을 올릴때 처음으로 본 신부의 얼굴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오십여년간 슬하에 3남 5녀를 두면서 서로 도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복하게 살아왔다.”(호암자전 중)

이병철 회장은 박두을 여사와의 첫 인상을 ‘건강한 여성’으로 표현했다. 박 여사는 형편으로는 중농정도였으나, 박팽년의 후손답게 엄격한 유교가풍이 살아있는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진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 본문에 박두을 여사와 슬하에 3남 5녀의 자녀를 둔 것으로 기술했다. 또 호암자전에 수록된 호암연보에는 3남 5녀 외에 1남 1녀의 자녀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1926년 박두을 여사와 혼인 후, 3년 뒤인 1929년 12월 2일 장녀 인희를 낳았다(이하 존칭 생략). 2년 뒤에는 장남 맹희(1931.6.20)에 이어서 차남 창희(1933.5.24), 차녀 숙희(1935.8.22), 3녀 순희(1940.2.29), 4녀 덕희(1941.2.7), 3남 건희(1942.1.9), 5녀 명희(1943.9.4)를 차례로 낳았다. 일본인 처 쿠루다 미찌꼬 씨와의 사이에서 4남 태휘(1953.5.8)와 6녀 혜자(1962.8.4)를 낳았다. 호암연보에 명기된 1남 1녀의 자녀가 이들이다.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 이병철 전 회장이 일본 현지처인 쿠루다 사이에 태어난 태휘와 혜자를 호적에 올린 사실을 밝혔다. 이맹희 씨는 이 같은 ‘비밀’을 밝히게 된 이유에 대해 쿠루다를 사이에 두고 자신과 아버지가 알력 다툼을 벌이면서 멀어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한때 일각에서는 4남 이태휘 씨가 호암의 뒤를 이을 후계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쿠라다 야쓰데루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이태휘 씨는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986년 처음으로 삼성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CJ상무로 임명되어었다.

이태휘 씨가 한국에 들어오고 마련한 거처는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집과 불과 5분 거리인 한남동 남산 하얏트 호텔 옆 아파트였다. 임종을 앞두고 부인 박두을 여사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던 그의 거처를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던 사람도 모든 자녀들 중에 이태휘 씨가 유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일본인 처에서 낳긴 했지만 이태휘 씨는 이병철 회장이 나이 마흔을 넘겨 얻은 막내 아들이었다. 큰 아들, 둘째 아들과 서먹한 관계에 있던 이 회장은 막내 아들의 총명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 때문에 병마로 지친 심신을 위로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태휘 씨는 일본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스탠포드대학원을 나왔다. 스탠포드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도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권유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이태휘 씨는 곧바로 한국행을 하지 않고 일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끈질긴 부름으로 삼성행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행 후 곧바로 삼성비서실 이사로 발령받으면서 그룹내에서는 그의 얘기로 한동안 화제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정황상 당시 이병철 회장이 내심 그를 후계자로 염두해 두고 있다는 루머가 그룹내에 퍼지기도 했다고한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 타계 후 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진 탓인지 무척 우울해 보였다고 측근 중 한 사람은 전했다. 이후 동생 혜자씨와 어머니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는 소식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호암재단의 한 관계자는 현재 태휘와 혜자 남매가 삼성가와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아는바가 없고 답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고 답했다. 또 그들의 호암추모식 참석여부에 대한 질문에 “전혀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4남 이태휘와 6녀 이혜자 외에도 4녀 이덕희 또한 혼외자로서 이병철 회장의 호적에 입적되었다. 집안에서 덕자라고 불리기도한 이덕희 씨는 이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낳기 전인 불과 11개월 전에 대구에서 따로 낳은 딸이다. 남편은 중앙일보 사장과 삼성화재 회장 등을 지낸 고 이종기 씨다. 이종기 씨가 중앙일보 상무시절 주변의 기자들이그가 남편인줄 모르고 이덕희 씨에 대한 가족간의 이런저런 소문에 대해 자꾸 물어보자 “내가 그의 남편”이라고 밝혔다한다. 그러나 일부 기자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어넘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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