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 <고향의 봄>

2015-03-18     글 사진 이정식 발행인
▲ 꽃대궐을 생각나게 하는 섬진강변 매화마을의 봄 풍경(사진 이호 작가)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고향의 봄>이다. 그리고 ‘고향’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노래도 <고향의 봄>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고향의 봄>은 봄의 노래지만, 또한 고향을 그리는 모든 이들의 노래이다.
남북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많지 않은 노래 중 하나이다. 남북 분단 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고향의 봄

이원수 작시 홍난파 작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노래는 시인 이원수(1911-1981)의 동시 ‘고향의 봄’에 홍난파(1897~1941)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원수가 경남 마산에서 살던 14-5세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소파 선생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에 원고를 보냈다. 그중 <고향의 봄>이 이듬해인 1926년 4월호에 입선(은메달을 상으로 받음)되어 실리면서 그의 이름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고향의 봄>에 처음 곡을 붙인 이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동요작곡가 이일래(1903~1979)다. 이일래는 동요 <산토끼>의 작사 작곡자로 잘 알려진 분. 그러나 이일래의 <고향의 봄>은 당시 마산 등 일부에서만 불렸다.그러다가 1929년에 홍난파가 지금의 곡을 붙인 후부터 전국적으로 널리 불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대표적인 봄노래이며 동요이지만 성인들의 합창곡으로도 많이 불린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가곡스타일로 감칠 맛 나게 부른 <고향의 봄>도 있다.

 이원수 선생의 부인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유명한 동요 <오빠생각>의 작사자인 최순애(1914-1998)다. 이 역시 최순애가 11살 어린 소녀 시절에 쓴 동시다. 방정환이 펴내던 <어린이>에 최순애의 <오빠생각>이 실린 것은 <고향의 봄> 보다 다섯달 먼저인 1925년 11월이었다. 세 살 차이였던 두 사람은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르게 된다. <오빠생각>도 홍난파가 <고향의 봄>과 같은 해인 1929년에 곡을 붙였다. [주: <오빠생각>에는 후에 박태준(1900~1986)도 곡을 붙였는데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오빠생각>은 박태준의 곡이다.]

<고향의 봄>은 고향 창원을 그리며 쓴 동시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쓴 곳은 마산이다. 그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창원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이원수는 1980년 월간 <소년> 잡지에 실은 <자전 회고록,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고향의 봄>을 쓴 소년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이사해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나는 이 마을 서당엘 다니며 <동몽선습> <통감> <연주시> 등 한문책을 배웠다. <천자문>은 집에서 아버지가 미리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동문은 석벽이 남아 있었고, 성문은 없었지만 성문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다녔다.

동문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서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라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그러던 내가 아홉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의 벌이가 잘 안되어 생활이 너무 궁했으므로 한 40리 거리가 되는 진영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나의 세계였던 조그마한 우리집 -그 이웃의 동무아이,정든 동문 밖 개울들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이삿짐을 실은 수레가 떠나고 우리도 집을 나올 때, 나는 뜰에 줄지어 심은 키 작은 국화꽃들 -철이 지나 꽃의 빛깔마저 변해가는 그 국화꽃들이 초라하게 혼자 남는 걸 처량하게 생각했다. 찬 바람 부는 길을 걸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걸 느꼈다. 그건 늦가을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 처음 타는 기차를 타고 갈 호기심과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서였던 것 같다.

진영에서의 1년은 외로운 나날이었다. 이웃에 같은 또래의 동무가 없었고, 다니는 서당에도 정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리 집은 진영을 떠나 마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나는 열살의 소년으로 마산서 비로소 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당의 한문 공부와 다른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과서는 쉽고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일본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작문을 했다. 나는 그림과 글짓기에서 항상 우등이었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이 동요 <고향의 봄>은 곧 이일래라는 분의 작곡으로 마산의 사립학교에서 많이 불리기 시작했다.

이일래 선생은 그 때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 선생이셨다.뒤에 <산토끼>라는 동요도 그 분의 작사 작곡으로 되었었는데 197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향의 봄>이 발표된 지 2~3년 후 홍난파 선생도 <고향의 봄>을 지어 (노래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고향의 봄>이 발표된 후로 나는 동요짓기에 열심이었다.

어린이 잡지에는 계속 작품을 보내어 자주 발표되었고, 일간 신문에도 부지런히 발표를 했다.

동요로 해서 나는 전국 각 지방에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들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 대구, 원산, 진주, 함경도의 이원, 수원, 유천 등지에 있는 동요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어 편지 왕래가 잦았다.

(월간 <소년>, 1980년 10월호)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던 낯모르는 친구들 가운데 자신보다 먼저 <오빠생각>이란 시가 <어린이> 잡지에 실렸던 최순애란 여학생이 있었다.

▲ 이원수-최순애 부부(1980년 문화의 날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은 후 기념 촬영)

<오빠생각>의 최순애를 만나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알게 되어 서로 편지와 사진을 주고 받으며 사귀게 되었다.

최순애는 당시 인천에 살고 있었다. 오빠 최영주가 <개벽>이라는 잡지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최영주는 방정환,마해송, 윤석중과 함께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운동을 폈던 이다.

이원수 최순애 두 사람은 젊은 아동문학가들의 모임인 동인회 <기쁨사>의 회원으로도 같이 활동했다. 그러면서 차츰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두사람의 결혼을 주선한 것은 오빠였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을 약속한 후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이원수가 ‘반일 독서회’ 사건으로 갑자기 구속된 것이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던 이원수는 1931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함안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다. 함안금융조합은 지금 경남 함안군 말산리에 있는 한국농촌공사 함안지부 자리에 있었다.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한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이원수는 함안에서 반일 성향의 독서회에 참여했다가 1935년 이 일로 체포, 구속되었다. 결국 징역 10개월을 언도받고 마산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했는데 이 때 형무소 안에서 동시 <두부장수>를 쓰기도 했다.

최순애는 그 동안을 잘 견디어 내었다. 이원수의 출소 후 두 사람은 1936년 최순애의 집, 즉 처가가 있는 경기도 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앞두고 최순애의 집에서는 전과자가 된 사위에 대해 마뜩지 않아했다는 얘기도 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마산합포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최순애는 결혼 후에는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선생의 뒷바라지와 2남 2녀를 키우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문학의 꿈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이따금씩 쓴 그녀의 시편이 유고로 남아있다.

서울 간 오빠는 돌아오지 못했다

최순애가 <오빠생각>을 쓴 사연도 잠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순애의 오빠 최영주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까지 한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귀국 후 일본 관헌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늘 일경의 감시를 받았으며, 그 때문에 숨어지낼 때가 많았다. 최순애의 <오빠생각>은 그런 오빠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시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작곡가 박태준은 마지막 귀절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를 작곡할 때 “흐르는 눈물이 오선지를 흥건히 적셨다”고 후일 회고했다.

그처럼 이 노래는 식민지 백성의 한이 서린 노래였다.
그래서 이 노래는 동요임에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겨레의 애창곡이 되었던 것이다.

최순애의 오빠 최영주.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겠다던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 경찰에 쫓겨 숨어 다니다가 건강을 해쳐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고 한다.

▲ 이원수문학관이 들어있는 창원의 '고향의 봄 도서관

평생 멍에가 된 친일시

‘반일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이원수는 감옥에서 나와 다시 함안금융조합에 복귀했으나 그후 요주의 인물이 되어 늘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이후 그는 친일시들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평생 큰 멍에가 된다. 다음은 창원 이원수문학관에 걸려있는 그의 친일시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히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손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소리는 하늘에 찼네.

(후략)

<지원병을 보내며> (1942, 『반도(半島)의 광(光)』)

친일시를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의 변명인지 모르지만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구백삼십칠 년에 나는 함안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이원수 <털어놓고 하는 말>, 1980)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난리통(1.4후퇴 때)에 이원수는 자녀 둘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자신이 겪은 이 비극을 그는 동화 <꼬마 옥이>에 담았다. 전쟁 기간중 이원수는 영국군을 지원하는 노무자가 되어 동두천에서 1년간 천막생활을 한 일도 있다.

종전 후 1954년 그는 한국아동문학회를 창립하여 부회장을 지냈고 1956년에는 <어린이 세계>라는 아동 월간지를 창간해 주간을 지냈다. 1962년에는 <어린이문학독본> 등을 출간했고, 1965년에는 경희여자초급대학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회갑을 맞은 1971년에는 아동문학집 <고향의 봄>을 간행했으며 이해에 한국아동문학가 협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는 67세 때인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문학부문) 을 수상했다. 이 해 예술원상 수상 축하 동시·동화집 <이원수 할아버지와 더불어>를 출간했다. 1980년 문화의 날에는 대한민국 문학상 아동문학 부문 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1년 1월 24일 구강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유해는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82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창원에 <이원수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사후 22년 뒤인 2003년 12월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