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언박싱] 그럼에도, 검찰개혁
추-윤 활극에 가려 본질인 ‘검찰개혁’은 뒷전으로 검찰권 분산하고 견제·균형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추미애-윤석열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 징계위원회와 관련해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강조하면서 사태 수습에 직접 나섰습니다. 문 대통령이 이번 사태에 대해 처음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언급한 것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묻지마 찍어내기’ 행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인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추 장관의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꼬리 자르기’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윤 총장의 해임은 징계위 적법 절차를 거치거나 이것이 윤 총장의 ‘법정 투쟁’으로 장기화될 경우, 민주당이 검찰총장 탄핵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윤 총장을 잘라내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바로 ‘검찰개혁’이라는 본질적인 이슈가 추 장관과 윤 총장의 활극에 가려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것입니다.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 모두 검찰개혁 자체보다는 감정적 싸움에 치중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추미애 장관은 5선 의원 출신의 노회한 정치인입니다. 여론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경험칙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검찰개혁이라는 이슈를 어떻게 본인의 대권구도와 동기화시켜 끌어갈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비참한 것처럼 추 장관 입장에서도 본인이 주인공으로 나선 검찰개혁 드라마를 어떻게든 흥행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추 장관은 5선 의원 출신답게 국민들에게 거의 날마다 ‘예능’ 수준의 활극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들 군대 문제로 야당의 질의를 받았을 때 ‘소설 쓰시네’라며 조롱했습니다. 그의 자택에 찾아오는 ‘스토커’ 기자의 사진을 공개하며 쓸데없는 분란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추 장관의 ‘오버’는 날마다 그의 동태를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시선에 못 견딘 측면도 있지만, 불평을 하는 듯하며 ‘내가 이 정도로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라는 자기과시욕이기도 했습니다. 재밌다고 추켜세우면 더 뛰어다니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추 장관은 업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그 도가 지나쳐 우군인 여당 의원들에게마저 ‘자중하라’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재미있어 하니까, 더 신이 났습니다. 적법 절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보고라인도 건너뛰게 하고 규정도 슬쩍슬쩍 고쳐가며 윤 총장을 쫓아내기에 바빴습니다.
국민들은 한 켠으로 ‘무어니 무어니 해도 싸움 구경이 제일이지’ 하며 날마다 방영되는 추 장관의 ‘액션연기’를 재밌게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켠으로는 공허했습니다. ‘이럴 때가 아닌데’라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도대체 검찰총장을 왜 쫓아내려고 하지’ 되묻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청률이 잘 나오니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검찰개혁은 뒷전이고 윤석열이라는 사람을 쫓아내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추 장관의 성난 얼굴빛만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추 장관의 윤 총장 찍어내기는 실패했고, 문 대통령이 대신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여당에서는 ‘혼자 분란만 키웠다’는 불만이 쏟아졌습니다. 이제 추 장관의 예능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 대통령이 ‘재미보다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며 그동안의 예능 위주 연출을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추-윤 전쟁 드라마가 히트 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상대역 윤 총장의 연기 ‘합’도 한몫을 했습니다. 윤 총장은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배입니다. 보스기질이 다분합니다. 주변을 의식하며 자신의 인기관리를 하는 스타일입니다. 지금 혼자서 온몸으로 살아있는 권력의 태질을 맞으며 견디는 것도 후배들에게 강단 있는 선배로 남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릅니다. 한때 ‘구름다리 위를 지나가는 검찰총장’ 사진이 날마다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조국 전 장관 사태 때 윤석열 총장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그 통로를 지나가는 장면을 담기 위해서였습니다. 윤 총장은 이후 구름다리에 선팅을 해버렸고 더 이상 점심 먹으러 가는 총장 장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윤 총장은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하지만 일부 사진기자들은 윤 총장이 카메라를 많이 의식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합니다. 노출은 싫어하지만 자신이 미디어에 어떻게 나오는지는 큰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혼잣말로 ‘카메라에 (내 모습이) 잘 나오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윤 총장이 미디어 노출을 꺼린다는 것은 검찰총장으로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 총장이 누구보다도 미디어를 잘 이용하고 있다는 시각에는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국정감사 때 윤 총장이 보여준 ‘정치적 퍼포먼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각에서는 윤 총장이 추 장관의 무리한 칼싸움에 대해 똑같이 활극으로 대응하면서 검찰개혁의 본질과 관심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썼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밀한 논리싸움이 아니라 감정 섞인 난장판으로 몰고 가면 그것에서 파생되는 불필요한 논란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검찰개혁의 본질이 흐려지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추 장관의 칼춤에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추락한 것만 봐도 윤 총장의 이런 ‘망나니 맞불 작전’은 꽤 성공한 것 같습니다. 추미애 장관은 대권주자 욕심에 검찰개혁을 예능 수준으로 접근했고, 윤 총장은 검찰개혁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감정싸움으로 그 본질을 흐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검찰개혁 본연의 장면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검찰개혁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국민들 다수가 ‘도대체 왜 추미애와 윤석열이 싸우느냐’며 피로감을 호소했습니다. 검찰주의와 그 폐해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보다 추미애와 윤석열의 맞짱 스토리만이 난무했습니다. 검찰권 독립과 민주적 통제라는 충돌하는 가치를 어떻게 현명하게 조율해야 하는지 치열한 논쟁은 사라지고 추미애의 자기과시에 빠진 오버 연기와 윤석열의 대권주자 놀이만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두 사람의 ‘자뻑’ 연기에 현혹되지 말고 검찰개혁에 대한 국론 모으기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현재의 검찰조직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검찰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력이 막강한 조직입니다. 180여석을 가진 집권여당이 검찰총장을 잡으려고 해도 잘 안 잡히는 조직이 바로 검찰입니다. 이번 추미애 장관의 ‘찍어내기’ 실패는 그의 철저하지 못한 전략에도 문제가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검찰조직의 기득권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막강한 검찰이 그 힘을 자의적으로, 자기들 입맛대로 쓴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이 검찰개혁인지 이 대목에서 되새겨봐야 합니다. 현재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대선자금 수사로 측근들이 날아가는 쓴맛을 보았습니다. 살아있는 권력의 집권 초반에도 이렇게 막강한 힘을 쓸 수 있는 조직이 바로 검찰입니다. 검찰 몇 명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기업은 그냥 날아갑니다.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 수사를 비롯해 숱한 장면들을 우리는 목도했습니다. 정권 말에는 권력의 비리 수사로 재미를 보고 조직의 안위를 영위해나갔습니다.
검사들이 누리는 특권은 막강합니다. 국가공무원 중 유일하게 검사들에 대한 징계만 별도의 법률에 따릅니다. 법관의 독립이 곧 재판의 독립으로 이어지기에 행정부 소속 공무원들과 달리 ‘법관징계법’이란 별도의 법률을 두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법무부 소속 외청의 공무원들만을 위한 특별한 징계법은 내용은 물론 행정조직 구조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검사들은 임용부터 3급 고위공무원 행세를 합니다. 조직 안에는 차관급이 수두룩합니다. 검사였던 사람들이 전관예우를 받으며 형사사법 전반을 왜곡하는 악질 관행도 뿌리 뽑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검찰조직은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습니다. 대부분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사법시험을 거쳐 임용돼 기수문화가 그 어느 조직보다 뚜렷합니다. 그들만의 조직에 대한 애정과 집착도 거의 종교수준입니다. 이번에 추미애 장관의 측근 검사들마저 줄줄이 사표를 던지는 것도 정권은 유한하지만 검찰조직은 무한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대형로펌에서 거액을 주고 모셔간다고 해도 박봉의 검사가 좋다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기소를 해서 감방에 보낼 수 있습니다. 기소권이 없는 경찰도 눈을 내리깔고 봅니다. 필자가 접해본 검사들은 대부분 똑똑하지만 은연중 자만심에 빠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존심도 하늘을 찌릅니다. 술자리에서 그들은 ‘대통령은 나도 할 수 있다’는 남다른 자신감과 오만함을 드러내곤 합니다. 검찰조직을 떠난 한 고위간부는 “억만금도 필요 없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들이 맛본 권력과 조직의 힘은 그토록 막강하고 끈질긴 것입니다.
그들은 ‘대학교수’ 조국 전 장관이 자신들의 ‘상관’으로 오려고 하자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야말로 탈탈 털었습니다. 한 전직 고위검찰 간부는 필자에게 “나라를 생각해서라도 조국 같은 사람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윤석열 총장도 이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각을 했습니다. 검찰 눈 밖에 난, 미운털이 찍힌 대표적인 사람이 조국 전 장관이었습니다(물론 이 과정에서 조 전 장관의 개인적 흠결도 많이 드러나긴 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생각하는 대의와 공명심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의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검찰 중심적이며 자의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물론 이런 검찰의 오만한 행태는 정치가 부추긴 측면이 있습니다. 검찰 출신 의원이 많은 현재의 정치문화를 볼 때, 검사의 힘을 정치에 악용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정적의 비리 정보를 검찰에 슬쩍 흘려 상대를 제압하는 과정을 지켜본 검사들은 정치를 두려워할까요? 오히려 ‘상대해보니 정치인도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치와 검찰 권력의 야합을 끊기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해주려고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정치 검사’들에 대한 일종의 좌천성 인사를 추진했습니다. 대신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검찰과의 핫라인(직통 전화)을 끊은 것도 노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의 힘과 조직생리를 너무도 몰랐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검찰에게 자율성을 주었지만 제도 개혁까지는 나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저서 <운명이다>에서 “나는 검찰의 중립을 보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면 검찰도 부정한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이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고 후회했습니다. 검찰 중립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검찰 장악의 힘을 풀어주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검찰의 기득권 지키기의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도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정권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맞춰 장악하려는 시도만 버린다면 검찰의 민주화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저절로 따라온다고 봤다.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다(<검찰을 생각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이후로 문 대통령에게는 개혁의 대상이자 ‘기득권’인 검찰이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이 자리 잡히게 됩니다. 그 결과 문 대통령이 구상하던 검찰 개혁의 요체가 바로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검사가 2100여명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윤석열 총장같이 사람보다 조직을 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차 하면 조직을 위해 직도 던질 준비가 돼 있는 열혈 검사들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년, ‘검사와의 대화’에서 평검사들은 “검찰 조직문화를 존중해달라”며 대통령의 인사권을 검찰총장에게 넘기라는 반 헌법적 황당 요구를 할 정도였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였지만 검사들은 대통령의 ‘청탁 전화’를 면전에서 ‘취조’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검찰의 독립성 측면에서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을 대는 용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대통령도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조질 수 있다’는 오만함의 공개 시연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자존심은 짓밟혔고, 국민들의 뇌리에는 ‘검사들이 세긴 세구나’ 하는 학습효과만이 각인됐습니다.
그 뒤 2020년 평검사들은 또 다시 들고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평검사와 지금의 검사는 수사 방식이나 선후배 위계질서 등에서 좀 느슨해진 측면이 있습니다만, 검찰주의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물론 이들이 분노한 것은 절차적 정당성의 훼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검찰조직 수호라는 집단 이기주의도 깔려 있습니다. 180여석을 가진 집권여당도 쩔쩔맬 정도이면 도대체 누가 검찰 권력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검찰을 통제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독립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검찰의 독립성을 ‘조직 수호 방패막’으로 악용하려 한다면 이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합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고 노 전 대통령은 한탄했습니다.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한다고 해서 중립성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립성이라는 검찰 집단 이기주의 울타리 안에서 검찰은 그들의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자유의 공간을 더 넓혀나갔던 것입니다. 또한 검찰이 응집된 조직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만 움직이면 그것이 바로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는 것입니다.
윤석열 총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생명과도 같다. 검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은 부패한 것과 같다“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윤 총장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그 ‘중립’은 과연 객관적이고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운 순수한 중립일까요? 우리는 그 중립을 어떻게 담보해낼 수 있을까요? 1997년 국회는 ‘검찰총장은 퇴임 후 2년 동안 공직에 임명되거나 정당의 당원이 될 수 없다’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몇 해 전 김도언 검찰총장이 퇴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당시 김기수 검찰총장의 헌법소원으로 위헌 결정을 받았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검찰총장을 비롯한 모든 검사가 이에 대한 확고한 소신 아래 구체적 사건의 처리에 있어 공정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확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헌재가 말한 검사의 확고한 소신을 우리는 어느 정도 신뢰해야 할까요? 제도적인 견제 장치 없이 검사의 양심에 그 중립성을 통째로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검찰의 중립성을 검사들의 양심과 선의에 맡긴 결과가 작금의 상황입니다. 이번 추-윤 사태는 정치권력과 검찰권력이 감정적으로 맞붙은 것이지, 결코 검찰개혁의 본질적인 진통과정은 아니었습니다. 쇼맨십 강한 두 사람의 불꽃 튀는 액션연기만 난무한 채 검찰개혁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끝이 난 해프닝이었습니다.
검찰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되, 정치권력도 검찰조직을 자신들의 휘하에 예속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추미애 사태의 본질도 정치권력이 검찰권력을 힘으로만 찍어 누르려고 한 데서 온 검찰의 집단 저항 결과물이었습니다. 정치가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해주려면 그들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가까이하려는 유혹을 떨쳐내고 법률적인 관계로서만 기능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포함해 그 누구도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도록 검찰권을 분산하고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검찰개혁의 핵심 과제입니다. 검찰의 힘을 무작정 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올바르고 중립적으로 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 과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끊임없이 연구되고 또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추미애-윤석열의 활극은 이제 막을 내릴 것입니다. 극장 문은 닫혔습니다. 추-윤의 신들린 연기에 취해있던 우리들도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이성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비록 재미는 없겠지만, 이제는 오롯이 검찰개혁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