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언박싱] ‘테스형’은 과연 알고 있는 것일까요?
나훈아 KBS 단독콘서트 시청률 29%…추석 최대 화제로 공연중 멘트 놓고 여야 정치인 공방도…신곡 ‘테스형’ 메시지 새겨봐야
이번 추석의 화제는 단연 나훈아였습니다. 나훈아 KBS 단독 콘서트 시청률은 29%(닐슨코리아)로 전국 1위(지상파)를 기록했습니다. 3일 오후 10시 30분 방송된 재방송 성격의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15년 만의 외출’ 시청률도 18.7%에 달했습니다. 중장년층에게는 과거의 나훈아 향수를 달래주는 자리였고, 젊은층에게는 최근의 트로트 신드롬 ‘원조’를 확인해주는 무대였습니다.
그의 공연이 이토록 화제가 된 것은, 15년만에 다시 무대에 섰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가 툭 내뱉은 ‘멘트’ 하나가 연휴 내내 ‘정치적’ 논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훈아는 첫 곡 ‘고향으로 가는 배’를, 무대에 띄운 거대한 배 위에서 불러 공연의 ‘웅장함’을 예고했습니다. 와이어 액션을 선보이고 과거 자신이 등장한 화면과 듀엣으로 공연하는 장면도 연출했습니다. 무대 양옆과 전면을 둘러싼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미디어 아트도 선보였습니다. 국악에서 록까지 가수 나훈아의 역량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번 공연에는 온라인 관객 1000명도 함께했습니다. 국내는 물론 일본, 호주, 러시아, 덴마크, 짐바브웨 등지의 전 세계에서 나훈아를 열광했습니다. 한국 무대예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자리였습니다.
나훈아는 노 개런티로 비대면 콘서트 출연한 것에 대해 “코로나19 때문에 (모두 힘들 때) 내가 가만히 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공연을 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무대가 끝나갈 무렵 나훈아는 불현듯 ‘소신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공연에서 주로 사랑과 삶에 대한 서민들의 애환을 이야기했던 것에 비하면 이날 ‘발언’은 분명 작심한 듯 보였습니다.
공영방송인 KBS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 “KBS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 국민을 위한 방송이지요? 두고 보세요. KBS는 앞으로 거듭날 겁니다”라고 쓴소리를 했습니다. 이 발언은 현재의 KBS 방송이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국민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방송이었다는 점을 간접 지적한 셈입니다. 가수들은 보통 어떤 식으로든 방송사의 경영이나 상황 등에 대해서 무대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나훈아 정도의 ‘내공’과 위상이 있었기에 무대를 빌려 방송사에 고언을 던진 것입니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나훈아는 섭외하기 거의 불가능한 가수다. 어렵게 출연이 성사된 만큼 조건도 까다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양측 사이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는 암묵적 합의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공연은 녹화로 진행됐기 때문에 KBS측에서도 나훈아 멘트를 잘 알고 있었고, 그냥 내보낸 것이다. 듣기에 따라 KBS에 껄끄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번에 KBS는 시청률 대박과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프로그램 히트를 친 것만으로 충분히 이득이 나는 장사였다. 양측의 접점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나훈아는 코로나라는 대형 소재를 본인의 복귀무대로 선정해 큰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그동안 와병설, ‘바지 퍼포먼스’ 등으로 이미지가 심대하게 타격을 받았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 예전의 레전드 가수로 화려하게 돌아왔습니다. KBS는 섭외가 어려운 가수를 출연시킨 것만으로도 만족한 결과였겠죠.
그런데 나훈아의 ‘발언’은 예상보다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나훈아는 코로나 방역의 영웅으로 의사와 간호사를 칭송하면서 “우리는 많이 힘들다. 많이 지쳐있다. 옛날 역사책을 보면 제가 살아오는 동안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켰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유관순 누나, 진주의 논개, 윤봉길 의사, 안중근 열사 이런 분들 모두가 다 보통 우리 국민이었다. IMF때도 세계가 깜짝 놀라지 않았냐. 집에 있는 금붙이 다 꺼내 팔고, 나라를 위해서.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1등 국민이다”고 일갈했습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전 국민은 지금 심각한 생활불편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심리적 타격도 엄청납니다. 이런 전 국가적 스트레스 상태를 해소해줄 대형 이벤트를 나훈아가 기획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노래가 가진 순기능적 측면이지만, 나훈아가 공연 중 던진 ‘사회성 강한 발언’은 우리에게 정치의 근본적 역할을 되묻게 합니다.
나훈아의 발언에 국민들이 크게 박수를 보낸 것은 바로 ‘공감’입니다. 흔히 정치인들은 ‘국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어딜 가도 국민을 위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1야당의 당명은 ‘국민의힘’입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왜 자신들이 정치의 주체이자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훈아는 국민들의 바로 그 ‘허전함’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는 말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여야는 나훈아의 이 발언을 두고 서로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나훈아 선생 말씀 중에 현실 비판도 없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당 장제원 의원은 “권력자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가 키워드”라고 했습니다. 반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나훈아 발언의 핵심은 민주주의”라고 반박합니다.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도 “나훈아의 말이 문재인 정권 비판 민심인 것처럼 난리”라고 말했습니다.
여야의 이런 해석에 국민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요? 한 유행가 가수(그것도 73살이나 먹은 원로가수)의 무대 발언 하나에 그렇게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겠죠? 나훈아의 발언은 힘 있고 위세 떠는, 한국 사회지도층 인사의 ‘거들먹 문화’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언제나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지도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그들의 언행이 위선적이고 이중적이었음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우리는 괜찮다’며 국민을 안심시키던 이승만 대통령은 혼자 살겠다고 몰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자기 목숨 하나 구하려고 야반도주 하다시피 내뺐습니다. 평소 산해진미에 온갖 권력을 향유하던 한국의 지도자들은 정작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안위만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작금의 여야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국 이래 최대 재난이라는 코로나19 시대에서 여야 정치인들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실직당하고 폐업한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고 참으라고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국회 나가서 몇 시간 적당히 논쟁하다가 퇴근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 어떤 실효성 있는 대책, 국민이 공감할 만한 대책도 내놓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법무부 장관의 거짓말 논란에는 목숨을 걸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 싸웁니다. 내편이니까 지켜주어야 한다는 조폭논리가 횡행합니다. 한 장관이, 그것도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버젓이 거짓말을 한 것도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진실이 됩니다. 지금의 정치는 진영논리만 작동할 뿐, 그 어디에도 ‘국민’은 없습니다. 민간인 사살 사건으로 생산성 1도 없는 논쟁으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훈아는 철 지난 유행가 가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노래가 이렇게 화제가 되고, 공감을 받는 것은, 바로 그 가사 속에 국민들의 애절한 ‘심통’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국민을 대변한다고 하는데,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었을까요? 국민들이 나훈아의 노래와 멘트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도, 바로 지금 우리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잘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야는 나훈아의 발언을 두고 이해득실을 따지며 제 논에 물대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매함을 넘어 뻔뻔하고 한심한 작태입니다.
온갖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도 조그마한 흠결에는 ‘법대로’나 ‘진영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게 작금의 정치인들입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입니다. 지금도 한 장관의 배우자가 외교부의 ‘여행 자제령’을 뚫고 미국 여행길에 올라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장관의 남편 사생활까지 간섭하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한국 사회지도층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남의 사생활까지 간섭하느냐’는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공항을 빠져나가는 그 배우자를 보며 국민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요?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정치가 서민의 심정을 대변해준다고 느낄까요? 강경화 장관의 변명 또한 비상식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그는 “(남편이) 워낙 오래 계획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미국에) 간 거여서요. 귀국을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했습니다. 마치 남의 집안일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5일 정부의 해외여행 자제 권고에도 ‘요트 구매’를 위해 출국한 강경화 외교부장관 남편을 겨냥해 “모두의 안전을 위해 극도의 절제와 인내로 코로나19를 견뎌 오신 국민들을 모욕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일부에서는 나훈아의 정치적 성향을 두고 그가 문재인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가 오프닝곡으로 부른 ‘고향으로 가는 배’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형 김정남이 사망 전(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살)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고 합니다. 2017년 11월 서울 콘서트 때 나훈아가 김정남 사진을 대형화면에 띄워놓고 “나는 노래밖에 알지 못한다. 정치는 전혀 모른다. 근데 이 사람이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라며 ‘고향으로 가는 배’를 불러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나훈아는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 공연에 초청했지만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훈아가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해석도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나훈아의 발언은 진영논리가 아니라 힘 꽤나 쓰는 권력자들에게 던진 ‘경구’로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나훈아가 이번에 내놓은 신곡 ‘테스형’은 정말 탁월한 현실 감각을 보여주는 노래라고 봅니다. 아버지의 산소를 오랜만에 찾아 안타까움을 전한 곡이었지만, 나훈아는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환하는 기발한 발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곡에선 세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겸양’과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정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제자 알키아비데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을 지금의 현실로 끌어왔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세상과 사랑이 왜 이래?”라고 되묻습니다.
한국의 권력자들은, 정치인들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겸손이라는 말을 알까요? 권력의 힘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 겸손해할까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현 시대에서 위선적인 권력자들을 가장 잘 묘사한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크게 유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훈아는 ‘어떤 가수로 남고 싶으냐’는 마지막 질문에 “유행가,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인데… 뭐로 남는다는 것 자체가 좀 웃기는 얘기”라며 “그런 거 묻지 마소!”라고 답합니다. ‘그냥 흘러가는 노래 부르는’ 유행가 가수의 한 마디에 국민들이 너도나도 공감하고 열광하는 그 ‘진의’를 도대체 지금의 권력자들은 알고나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