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여성독립운동가 어윤희, 개성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다
(37)어윤희, 독립과 아동복지에 헌신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어윤희 魚允姬 (1880-1961)
운동계열 : 3·1운동 | 훈격(서훈년도) : 애족장(1995)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어윤희 선생은 어린 나이인 16세에 결혼했지만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이 되어 집을 떠났고, 이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2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개성에 정착했고 1910년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그곳에서 미리흠여학교,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도사가 되어 전도 활동과 독립정신계몽을 자원했다.
기독교 남감리파의 전도사로 활동한 선생은 1919년 2월 26일 개성 읍내 호수돈여학교 기숙사에서 개성 충교예배당 유치원 교사인 권애라로부터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받아 개성 지역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서울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독립선언서를 2000부 정도를 인쇄하여 읍내 각지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 등과 함께 읍내의 만월정, 북본정, 동본정 등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이로 인해 개성에서는 3월 3일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1500여 명의 시민이 참가함으로써 대대적인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선생은 일본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유관순 열사 등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해 옥중만세를 불렀다.
출소한 뒤에는 더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나갔다. 1920년 남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가 결성된 뒤 부회장으로 선출됐으며, 독립운동자들에게 여비를 마련해주기도, 탄환 등을 전달하기도 했다.
1937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했으며, 해방 후 서울 마포에 ‘유린보육원’을 재건해 죽는 날까지 고아들을 돌봤다. 1952년 서강교회 장로로 10여 년간 시무했다. 1953년 사회사업가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The Florence Nightingale Medal)’을,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