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토크] “하늘나라로 떠난 어머니를 그리며”
죽음의 심리학
개성있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유명했던 트로트 가수 현인(1919-2002). 그가 부른 노래 중에 ‘비내리는 고모령’이 있다. 1948년에 만들어진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고향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는 아들의 애닮은 심정을 노래한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는 그 날 밤을 언제 넘느냐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더냐/ 장명등이 깜빡이는 주막집에서/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오늘 밤도 불러본다 어머님의 노래“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지만 6.25를 거치면서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과 겹치면서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당시 사람들은 천리 타향 쓸쓸한 주막집에서 구슬프게 어머님을 목놓아 부르는 주인공의 ‘망향초 신세’ 타령이 바로 자신들의 노래였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 노래는 훗날 가요무대가 선정한 한국인이 즐겨부르는 트로트 빅3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나는 서부 경남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상도 촌놈이다. 대학시절을 서울에서 보낸 덕분에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어휘나 발음은 대체로 표준말에 가깝다. 하지만 고향을 지키는 분들은 당연하게도(?)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여전하다.
노래방에서 ‘비내리는 고모령’을 부르면 고향사람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으므님에 손을 놓고 돌아슬 때엔/ 부응새도 울읏다오 나도 울읏소” 글 써서 먹고사는 직업 아니랄까봐 사투리 가득 섞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교열본능이 작동한다. 같은 동향 촌놈 주제에 머릿속에서는 빨간 사인펜이 틀린 발음의 교정을 본다. 하지만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퍼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왜 갑자기 ‘비내리는 고모령’ 타령이냐고? 며칠전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뜬금없이 이 노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노래의 주인공은 살아서 어머니와 생이별했다면, 나는 엄마와 사별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쉬움과 슬픔의 정서는 비슷하다.
몇 달 전에 시골집에서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은 엄마는 응급실에 실려가 24시간이 더 지나서야 비로소 깨어나셨다. 2,3일 회복기간이 지나자, 우리 가족은 정밀검진을 위해서 엄마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셨다. 혹시 모를 다른 원인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의료진은 뇌병변을 비롯한 별다른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했다. 뚜렷하게 기력이 쇠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은 알 수 없다는 것. 단순히 노환과 기존병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라는 상식에 부합하는 추정말고는 없었다.
엄마와 가족 입장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재활치료를 위해서 부모님의 임시 거처가 정해졌다. 몇 달을 서울에 있는 4남매 자식들 집을 1주일씩 전전하시던 부모님은 드디어 분당의 모 종합병원 앞에 있는 오피스텔에 입주하셨다. 큰 병원 앞에서 통원치료를 받으시고 필요에 따라 입원치료도 받을 수 있는 체제를 갖춘 셈이었다.
제대로 된 진단명이 없이 시작된 재활치료는 신통치 않았다. 단순한 도수치료와 보행연습 이외에는 없었다. 중증 환자에 대한 근본적인 재활이 아니라 단순 재활치료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뾰족한 대안도 없이 속절없는 세월만 흘렀다. 그러다가 돌아가시기 며칠전부터 영문도 모른 채 기력이 부쩍 더 쇠약해지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점심을 챙겨드리러 갔을 때도 안 좋은 기색이 역력해서 근처 내과의원에서 링거를 맞혀드리고 일시적으로 기력을 회복하신 것을 보고 안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바로 입원을 시켜드려야 했는데 말이다. 하루가 다른 게 노인의 건강이 아닌가.
나는 저녁 약속도 미룬 채 부모님 옆에서 간호하다가 저녁식사를 못하시겠다는 엄마에게 죽을 사다 드렸다. 맛있게 드셨다. 자정 무렵 부모님 계신 숙소에서 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그게 엄마와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오전 아침 식사 후 낮잠을 주무시다가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향년 85세.
하나님은 ‘주무시다가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시게 해달라!’는 평소 우리 부부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지만 적어도 몇 년은 더 사실거라고 믿었던 우리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떠나신다는 한마디 말씀도 없이 허망하게 나를 떠났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나를 비롯한 4남매 누구도 임종을 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엄마를 꼭 안고 반드시 이렇게 고백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 아들이라서 너무 좋았어요. 사랑해요!” 그러나 그날 자정에 엄마와 헤어지면서도 그냥 “내일 뵐게요. 편히 주무세요!”라는 일상적인 인사말 이외에는 평소에는 잡아드리던 손 한번 잡지않고 엄마를 떠나보낸 것이 두고두고 맘에 걸린다.
우리가 잘 아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그림 중에 로마국립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여성의 세 시기’(1905)라는 게 있다. 그는 인생의 3가지 단계를 아기(유년기), 젊은 엄마, 노인으로 나눈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 클림트는 사람들이 어린아이에서 성년으로 그리고 노인으로 이어지는 3단계를 통과하면서 배워야만 할 저마다의 과제가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클림트의 그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왜 이렇게 늙고 죽는 걸까? 평소 노환에 시달려 기운이 없었다지만 또렷한 정신에 일상생활을 그런대로 잘 영위하시던 엄마는 왜 이렇게 유언 한마디 없이 갑자기 세상을 뜨신 걸까?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화의 원인을 하나 혹은 몇가지로 압축할 수는 없다. 자연선택은 신체 내 모든 부위의 노화속도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늙고 죽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다…자연선택은 무의미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최선의 전략은 모든 부위가 마지막에 일제히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다.”
노화에 단일한 원인이 있다면 그 고장된 장기나 신체부위를 고도로 발달한 현대기술을 이용하여 부품을 대체하듯 갈아 끼우면 될 것 같은데 왜 그것이 불가능할까 하는 고민을 한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에컨대 어제까지도 정정하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원인을 ‘총체적 붕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나는 총체적 붕괴라는 진화적 이상이 노화의 단일 원인을 찾는 생리학자들의 목표보다 낫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치아가 닳거나 빠지고 근력이 약해지고 청각, 시각, 후각, 미각이 부쩍 둔해진다. 심장이 약해지고, 동맥이 딱딱해지고, 뼈가 약해지고, 신장 기능이 저하되고, 면역계의 저항력이 약해지고,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도 노화의 흔한 증상이다. 진화는 모든 체계가 (일시에) 퇴화하도록 준비해 놓은 듯 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보자면 실망스러운 일이다. 노화의 단일 원인이나 주요 원인이 있다면 이것만 치료하면 젊어지는 샘물을 마시는 샘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우리가 하나의 치료법이 있는 하나의 메카니즘을 통해 퇴화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두 몇 백년씩 살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여분의 시간은 무엇에 쓸까?”
맞는 말이다. ‘총체적 붕괴’라는 표현도 납득이 가고, 무조건 몇백년을 오래 사는 것 또한 실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말처럼 엄마의 죽음이 총체적 붕괴라면 내가 엄마의 죽음 앞에서 ‘멘붕’ 즉 ‘심리적으로 총체적 붕괴’ 상태인 것 또한 사실이다.
여러 심리학자들이 사람의 발달단계나 성숙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구스타프 클림트처럼 인생을 크게 몇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사람이 ‘철이 드는 3가지 단계’가 있다고 본다.
제1단계가 결혼해서 애를 낳았을 경우이다. 애를 낳아 기르다가 애가 아플 경우가 있다. 그때 부모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가 우리 애 대신 아파주면 안될까?”하는 무조건적인 이타심, 긍휼한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시절은 잘 모르고 지나지만, 아이를 통해서 새롭게 체험한다. 그러므로 제1단계는 생로병사 중에서 생(生)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2단계는 40대 이후 중년기이다. 40대는 정신적 성숙과 아울러 육체적 노화가 막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년이 되면 소위 말해서 세상을 살아 오면서 산전수전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과정에서 축적된 인생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살게 된다. 제2단계는 생로병사 중에서 노(老)의 단계에 속한다.
제3단계는 부모님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중년 이후 노년기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산다. 칼 융은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목표로 삼고 준비하지 못하거나, 젊어서 미래에 대한 상상을 억압하는 것은 둘 다 신경증에 속한다.”
물론 부모님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아이의 출생을 통해 자신의 출생 초기를 되돌아보듯, 부모님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연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로병사 중의 병(病)과 사(死)가 제3단계에 해당한다.
융심리학자인 안셀름 그륀은 융의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두려움없이 다가갈 수 있는 목표로 정할 때 우리 영혼은 건강하다.” 맞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고 영원한 고향으로의 귀환’일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아 총체적으로 붕괴된 나의 몸도 마음도 추스리기 힘든 이 순간에는 클림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고, 다이아몬드의 주장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평소와 달리 존경하는 융과 그륀의 말 역시 아직까진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그냥 나는 생전에 엄마를 잘 모시지 못한 불효자일 뿐이다. 슬그머니 와버린 엄마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하다. “그때 조금 더 잘해드릴걸!”하는 순간들이 자책과 함께 불쑥불쑥 떠오른다. 책을 읽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아직은 실감이 나지않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 뿐이다.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이론은 다 필요없다. 실천이 중요하다. 지금이 부모님과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 엄마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라. 아버지를 안고 당신 아들이어서 좋다고 말씀드리시라.
언제까지 때만 기다릴 것인가. 적절한 타이밍? 죽음은 도둑처럼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마시면 젊어지는 샘물은 없다. 간절히 당부드린다. 싸늘하게 식은 엄마의 주검을 부여안고 오열하며, 뒤늦게 엄마 사랑한다고 외치던 나의 잘못을 여러분이 따라하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다.
김진국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대학, 언론, 정부부처, 공기업 등에서 근무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 기반으로 한 융복합적 콘텐츠 개발하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심리학자, 의학사, 의학석사, 대체의학박사(수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