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여성독립운동가 부덕량, 제주해녀항일운동사에 획을 긋다
(27)부덕량, 일본에 맞선 제주 해녀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부덕량 夫德良 (1911~1939)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건국포장(2005)
부덕량 지사는 제주 구좌면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이 10여 년 넘게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수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과 1931년 성산포와 하도리에서 조합이 경매가격을 하향 책정하는 횡포가 발생하자, 1931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공동 투쟁을 모색하게 됐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택해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본격 시위에 돌입했다. 이는 곧 시위 투쟁으로 발전했으며, 다음 장날인 12일에는 구좌면 뿐 아니라 정의면(현 성산읍), 연평리(현 우도), 시흥리 해녀들도 가세했다. 손에는 호미와 비창을 들고 조합의 부조리를 규탄하며 벌인 투쟁에서 제주도지사측은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은 사건의 조사와 함께 제주도내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려는 해녀들의 시위가 일어났으나, 1월 27일 종달리 해녀들의 시위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1만 7000여 명이 넘는 해녀들이 참여해 238회의 집회 및 시위를 전개한 해녀항일운동의 주동자로 몰린 부 지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남성보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초상화를 통해 그분들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나마 남아있는 흑백 사진을 유심히 살폈어요. 컬러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다보면 어색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배경과 인물을 칠할 색 선정에 특히 공을 들였습니다.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무조건 ‘센 언니’는 아니기에, 부드러운 인상도 느낄 수 있도록 했고요.” - 김성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