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日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 전파

(8)김마리아,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 회장

2020-08-12     김수진 기자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 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외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김마리아_신대엽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김마리아 金瑪利亞 (1892~1944)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독립장(1962)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 후 모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마리아 선생은 조국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생활 중이던 1915년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 임시 회장에 선출되어 일본 전체 여자 유학생회의 대표로 활동하며, 여성 의식의 자각은 물론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도쿄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2∙8독립선언'의 준비를 도왔으며, 이후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가지고 귀국해 황해도 지역 여성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3∙1운동 이후 모교인 정신여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를 결성하고 군자금을 모금해 상하이로 보내고 독립선언문을 배부하는 등 조국 광복 성취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19년 11월 조직원의 배신으로 선생을 비롯해 52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3년 형을 받고, 모진 고문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1920년 출감됐다. 이듬해 상하이로 떠나 치료를 받으며 임시정부에 참여해 활동하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해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유학 중에는 여성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귀국 후 지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던 중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