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토크] 코로나 시국, 슬기로운 가정생활을 위하여

- 배려(配慮)의 심리학

2020-04-28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온라인 속 어린이 '코로나19' 유머 / 인터넷 캡처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박목월(1916-1978) 선생이 젊었을 적 이야기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 저녁, 단칸방에 사는 시인의 집에서 태어난 지 석 달된 여아가 무시로 울어 젖힌다. 선생이 도무지 시를 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선생의 부인(유익순 여사)이 “옆집에 가서 놀다 올게” 하고는 둘째를 업고 바깥으로 나갔다.

한참을 시작(詩作)에 몰두하던 시인이 밤이 늦었는데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자고 있던 여섯 살짜리 아들을 깨웠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나가서 어머니를 좀 찾아오너라.” 동네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던 시인의 아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엄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가 아랫동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동규야! 너 어디 가니? 아버지 글 다 썼니?”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유 여사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친구 집에 놀러 간 게 아니라, 엄동설한에 눈구덩이에서 눈을 맞으며 집 근처 전봇대 옆에서 애를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험한 코로나 시국에 뜬금없이 박목월 시인 이야기는 왜 하느냐고? 요즘 코로나바이러스가 빨리 잡히지 않고 사태가 길어지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해방 직후와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지만 갑갑한 가정생활의 고충은 비슷한 것 같아서다. 한 집안에 사는 부모자식 간이라 해도 각자 자신들의 스케줄에 따라 자율적으로 이합집산하면서 서로 간의 개인적인 공간(personal space)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내 여동생 남편은 재택근무 중이다. 그 집의 둘째인 딸 역시 올해 대학 신입생인데 동기간들의 인사는커녕 캠퍼스조차 구경을 못했다. 그녀는 동영상 강의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녀는 “난 사이버대학교 대학생!”며 자조한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생들은 등록금 반환 운동을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예전에는 저녁 한 끼만 챙기면 되었던 동생은 하루 세끼 밥을 하고, 식단을 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한다. 지인 한 분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 세끼 꼬박하려면 순하던 사람도 변해요. 하루 두 끼가 정답입니다. 푸짐하게 두 끼!” 요즘 말로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맞벌이를 하는 내 작은 처남네는 딸만 둘이다. 올해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이다. 여중생은 오후와 저녁에 학원 수업이라도 있어 숨통이 트였지만, 초등학생은 종일 집안에만 갇혀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처남 부부는 온종일 집안에서 갇혀 있는 애들 생각에 직장에 출근해서도 맘이 편치 않다.

말귀를 알아듣는 초등학교 고학년생 이상을 둔 학부형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학 후배 A는 애 둘을 유아원이나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하고 아내가 24시간 돌보느라 몸은 몸대로 지친 데다 우울증까지 겹쳐 고생이 말이 아니다. 박목월 시인의 집은, 시인이 집필 중일 때 잠시 피하면 되었지만, 이 집은 종일 ‘꼼짝마라!’다.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흐트러지면서 다들 몸과 맘이 모두 성치 않은 것이다.

애들이라고 엄마 눈치를 안 보는 것도 아니다. 온라인에는 이런저런 유머가 떠돌아다닌다. 그중에 ‘코로나 방학생활 규칙’ 이란 게 있다. 내용은 이렇다. ‘주는 대로 먹는다. TV 끄라고 하면 당장 끈다. 사용한 물건 즉시 제자리. 한 번 말하면 바로 움직인다. 엄마에게 쓸데없이 말 걸지 않는다. 위 사항을 어기면 피가 ‘코로나’올 것이다.‘

유머의 속성이 그렇다지만 단순히 웃고 넘기기에는 실제를 너무 잘 반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그림일기 형식을 빈 이 유머는 이렇다. 아니 이건 유머가 아니라 실제 일기인 것 같다. 이 어린이는 그림 그리는 칸에는 괴물을 그려 넣고 이렇게 써놓았다. ‘방학이 길어지자 엄마들이 괴수로 변했다. 그 중에서 우리 엄마가 젤 사납다. 그래서 나는 아주 두렵고 무섭다. 그래서 나는 아주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어린이들은 놀이터에서 함께 모여 놀이를 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협동하는 사회적 기술을 익힌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해소한다. 놀이에서 이긴 어린이는 도파민이 배출된다. 도파민은 순간을 즐기고 쾌락을 담당하는 호르몬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넘쳐나는 에너지를 분출해야할 어린이들이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죽을 노릇인 것이다.

게다가 온라인으로 개학한 학생들은 동영상으로 강의를 듣지만, 오프라인 시절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아진 과제도 힘들다. 학생들만 힘들까.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기진맥진한다. 동영상 강의를 하려면 오프라인 강의를 하는 것보다, 몇 배나 품이 더 들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매일 공개수업, 연구수업을 하는 것 같아. 실시간으로 동영상 강의를 할 때 학부형들이 옆에서 지켜보는 경우도 많아서 긴장을 풀 수가 없어!” 물론 대학교수들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모 대학의 철학과 교수는 그런 강의 준비 스트레스를 오래전에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서 했던 내용을 그대로 틀어주는 것으로 대신하려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집안에 갇혀 살다 보니 음식 섭취량은 많고 운동량은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일러 ‘확찐자 증후군’이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때 쓰던 ‘확진자’라는 말을 빌려와서 하는 웃자고 하는 워드 플레이(word play)다. 코로나 때문에 살이 ‘확 찐 자’가 되었다는 우스개 소리인 것이다.

우리는 21세기 최첨단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수만 년 전 원시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들의 열량 흡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기근에 시달리던 당시에는 열량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량이 풍부한 지방을 보면 무조건 저장부터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하루 70~80그램 정도만 지방을 섭취하면 충분한데도, 100그램 이상의 지방을 섭취한다. 당연히 남은 지방은 피하지방 조직에 그대로 쌓이게 되는 것이다. 어쨌건 과잉섭취와 운동부족의 악순환이 코로나 시국에 더 심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재택근무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일도 공부도 컴퓨터로 해결하고, 여가도 웹서핑, TV보기, 휴대폰으로 소셜 미디어 접속하기, 채팅하기 등등 책상이나 소파에 앉아나 장시간을 보내는 가장 문명적인 자세, 그러나 가장 건강에 좋지 않은 자세로 필요한 칼로리 이상의 간식까지 먹어가며 소일하고 있지 않은가.

심리적인 건강의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나온 유머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유행하는 것 중에 이런 유머도 있다. ‘프랑스에서, 자가격리가 길어짐에 따라 정신과 문의가 많아지는데, 자가격리 중에 벽이나 식물에게 말을 건네는 정도는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을 걸었을 때 벽이나 식물이 대답을 하면 진료하러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유머의 속성상 어느 정도 과장, 왜곡, 축소는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그냥 웃고 넘기기엔 아까운 유머이다. 아무리 혼밥, 혼술, 혼영이 유행이라지만, 그건 스스로 혼자서만 뭔가를 하겠다고 자유의지로 결정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자신의 의사에 반할 때가 문제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만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그러니 벽을 보고 말을 하고, 식물에게도 말을 걸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코로나 시국이 끝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게 더욱 문제다. 자신 한 사람 추스르고, 가족들 챙기기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조금만 더 배려를 하는 세심한 마음, 따뜻한 마음이 절실한 때다.

앞서 말한 박목월 시인 가족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당시 6세의 아들이었던 박동규(1939- )전 서울대교수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서 처음 직장에 다닐 때 즈음, 조금 철이 들어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한 번 물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힘들었어. 돈도 많이 벌어오지도 못하고, 그런데 어머니는 뭐가 좋아서 밖에 나가서 일도 하고 힘들게 고생하면서 애를 업고 있었어?”

그런데 시인의 아내인 박 교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이 인상 깊다. “그래도 니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다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보라고 해!” 그리고는 박 교수는 말을 잇는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겪어가면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시 한 편을 읽어보라’고 하는 아버지의 배려의 힘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사는 것은 이런 배려를 통해서 서로 사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박동규 교수가 말하는 이 ‘배려의 힘’이다. 배려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걸 우리 조상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들이 무수히 많은 용어와 이론으로 배려를 이야기하고 소통과 공감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배려의 핵심,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핵심은 역지사지라고 생각한다. 나도 힘들고 고단하지만, 상대방은 지금 어떨까 하고 한 발짝 물러나서 생각해 주는 마음이 소통과 공감을 위한 전제이다.

내가 아는 교사 한 분이 초등 4~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코로나가 끝나고 평범한 일상이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그러자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1위는 가족여행 가고 싶다(24명). 2위는 마스크 안 쓰고 싶다(12명). 3위는 학교 가서 급식 먹고 싶다(5명). 4위는 친구 집에 마음대로 놀러 가고 싶다(4명). 5위는 지금 아무 것도 안하지만 계속 아무 것도 안하고 싶다(3명). 6위는 학교 안가고 이대로 살고 싶다(2명)이었다고 한다. 5위와 6위가 다소 황당하지만 어린이다운 진솔함의 표현이라고 본다.

코로나 시국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그냥 도둑처럼 끝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둑처럼 또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넋을 잃고 스트레스만 받고 살 것인가.

위의 어린이들처럼 가족여행 가고 마스크 안 쓰도 되는 그날까지 소박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해방직후 고단한 단칸방에서도 배려의 힘을 알고 배려의 지혜를 몸소 실천했던 시인의 아내를 생각하며, 이 시국을 우리 모두 슬기롭게 잘 넘겼으면 좋겠다.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