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청와대서 직접 최태민 '신문'···근혜양 눈물호소로 기사회생
[박근혜·최 패밀리 40년 게이트(1)] 생사 고비 넘긴 최태민 한동안 몸조심 하며 반전기회 노려
'여성경제신문'은 자매지인 '우먼센스'가 지난 1990년 12월호, 1993년 11월호, 1994년 8월호에서 보도한 최태민(1994년 사망)·최순실 단독 인터뷰 및 주변 인물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최 씨 부녀간 40년 인연을 5회에 걸쳐 되짚어본다. 최태민 씨는 국정을 뒤흔든 메가톤급 게이트의 장본인 최순실 씨의 부친으로 당시 기사 내용을 반추해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에 집착하는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씨의 부친 최태민 씨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한 때는 유신통치가 절정이던 197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 대통령은 큰 영애 신분이었다.
최 씨는 그 해 새마음봉사단의 모태인 구국여성봉사단을 창설해 근혜 양을 명예총재로 앉히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다. 이후 그는 봉사단 총재 신분을 악용, 끊임없이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인사청탁 등 물의를 일으켰다는 지탄을 받는다.
최 씨는 근혜 양을 만난 이후 적어도 세차례 생사의 고비를 맞았다.
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의 수사→박정희 대통령의 친국(親鞠)→10‧26 사태 후 계엄 치하의 합동수사본부 수사라는 절체절명의 고비를 요리조리 피해나가는 재주를 발휘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슬퍼런 통치 시절의 칼날을 무력화시킨 신통력을 부린 것이다.
우먼센스는 1990년 12월호에서 최 씨와 박근혜·근령·지만 삼남매의 인터뷰를 종합해 보도했다. 인터뷰가 나올 무렵이던 1990년 11월은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와 관련해 최 씨의 전횡을 규탄하는 시위가 표면화되던 시기였다.
최 씨는 인터뷰에서 중정이 자신에 대한 수사 기록을 작성한 최초 시점을 1977년으로 기억했다.
그는 "(중정)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 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것이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구체적인 조사 상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결론은 당시 중정부장이던 김재규가 내렸냐는 질문에 최 씨는 담담하게 "왠걸,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라고 확인했다.
실제 대통령 면담록이나 주변 인물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중정이 1977년 최 씨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직접 확인 작업을 벌였다. 그런데 방법이 특이했다. 조선시대 임금이 중죄인을 국문하던 제도인 '친국'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최 씨에 따르면 그는 당시 위출혈로 서울 고려병원에 입원 중이던 상황에서 9월 12일 밤 청와대로 불려갔다. '친국' 자리에는 박 대통령과 본인, 근혜 양만이 있었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은 중정에서 올라온 적지 않은 분량의 수사 기록을 넘기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이런 일 있습니까?" "그렇소?"식으로 따졌다고 한다. 신문은 1시간 가량 계속됐다.
최 씨는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자신의 비리 의혹을 사실무근으로 결론내렸다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내놨다.
그는 "박 대통령 앞에서 조사를 받는다면 바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데 소상히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새마음) 봉사단 지부장 등의 청탁이 제법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권을 찾아 움직이질 않았다"고 강변했다.
최 씨와 근혜 양이 주도했던 새마음봉사단은 여성 회원 수만 500만명에 이르는 준(準)관변단체였다.
이권에 개입했다면 (받은) 돈이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박 대통령으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 최 씨의 반박 논리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박 대통령 측근들의 증언과는 뚜렷한 격차가 있다. 김재규는 1979년 10‧26 사건에 대한 군법재판 및 수사과정에서 친국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박 대통령은 한쪽에 나(김재규)·백광현 국장, 그 반대편에 근혜 양을 앉히고 신문하기 시작했다. 근혜 양은 울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박 대통령은 검찰에 또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의 조사결과도 나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최태민은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최 씨의 증언과는 참석 인원에 차이가 있는데다 결백했기에 대통령 앞에서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는 최 씨 주장과 달리, 근혜 양의 읍소로 그가 기사회생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당시 한 매체는 청와대 친국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부하들 앞에서 딸의 치부를 보고받게 된 박 대통령은 노여움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 붉으락 푸르락 얼굴 표정을 몇 번이나 바꾸다가 끝내는 분을 참지 못했던지 "중앙정보부에서는 그런 일도 조사하나…. 알았어. 그대로 두고 나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하고 화를 냈다.'
최 씨 입장에서 대통령 국문은 생애 최대의 시련이었을 것이다. 위험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그는 한동안 몸조심을 하며 대규모 활동을 자제했던 듯하다.
그러나 2년뒤에 터진 10‧26 사건은 그에게 또 한 차례의 시련을 가져온다. 김재규의 재판과정에서 '최태민' 이름 석자가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어서 서면으로 하는 진술 보충서 속에 남기고자 합니다.'
이 보충서에 의해 최 씨는 합수부의 수사대상이 된다. 결국 최 씨는 강원도 모 부대로 끌려갔지만 1년여 만에 풀려난 것으로 전해진다. 죄목은 부정 축재였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최 씨는 더욱 몸을 사렸던 것 같다.
이를테면 박 대통령의 유업을 기리는 근혜 양의 대외 활동에 노골적으로 관여하는 등의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90년 10월의 육영재단 사태 때 그를 둘러싼 의혹이 문제시된 점으로 미뤄 '노출되지 않는' 관계가 상당기간 유지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박근령‧지만씨 같은 근혜 양의 친동생들이 공개적으로 ‘최태민을 누나에게서 떼어놓아야 한다’고 호소했던 사실에서 알수 있다.
두 사람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누나(언니)가 최태민에게 속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탄원했다.
탄원서에서 그들은 "최태민은 순수한 저희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며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태민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다"라고 썼다.
탄원서 제출 배경에 대해 지만씨는 우먼센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큰 누나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날때만 해도 저는 육사에 있었기 때문에 몰랐어요. 육사 졸업후에도 누가 얘기해주지 않아 쭉 모르고 지내다가 그 사람이 큰 누나를 배후조종한다는 소리를 한 2년전부터 듣게 됐어요. 비록 좋은 사람이라 해도 나쁜 말들이 떠돌면 큰 누나와 떼어놓아야 한다는 입장인데, 깜짝 놀랄만한 소문까지 접한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먼센스가 단독입수한 근령씨의 자전수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근령 씨는 "최태민의 육영재단 운영 개입에 관한 이러저러한 좋지않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어오면서 그가 언니를 옳게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며 "그런데 소문이란 참 이상해서 돌고 돌다가 결국 당사자의 귀에는 가장 나중에 들어가는 법이라 정작 언니는 세세한 부분들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듯 싶다"고 토로했다.
지만 씨는 현 정부들어 "누나(박근혜)가 최순실, 정윤회 이야기만 나오면 최면이 걸린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던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박관천 전 경정에 따르면 지만 씨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최순실, 정윤회 두 사람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40여년에 걸친 우산방어 덕에 최 씨 패밀리는 대를 이어 국정에 깊숙히 개입하면서 갖가지 특혜를 누려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