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 더봄] 텅 빈 쌀독과 부족한 퍼즐 조각
[손민원의 성과 인권] 결핍 채우기 위한 성실함은 중요하다 서로의 결핍 돌보는 마음도 있었으면
여러분은 가난한가요, 아니면 부자인가요?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부자인가, 얼마나 없어야 가난한가?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5층 건물에서 한 달에 몇십억원의 월세를 받고 있다는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들어오는 길에 문득 부자와 가난의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매달 조금씩 오르는 부모님의 요양원비, 통신비···. 들어오는 것에 비해 나가는 게 많은 내 빠듯한 살림에 비하면 무엇이 걱정일까 싶으면서도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위로하고 있는 꼴이 됐다. 가졌으면 가진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이런저런 걱정 속에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하다 보니 부자와 빈자의 기준이 통장의 잔고에 달려 있지는 않은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핍’ ‘결핍’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궁핍은 ‘텅 빈 쌀독’이라 할 수 있다.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가난’이다. 쌀독에 쌀이 없어서 굶주린다면 이것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크다. 이제는 많은 시민의 인권 의식이 높아져 쌀독에 쌀이 없어 굶어야 해서, 찢어지도록 가난해 병원에 못 가서, 의식주의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 가족의 문제를 보면서 국가의 책무를 끄집어낸다.
결핍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나 필요한 요소가 없어서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나는 매년 옷을 사서 옷장엔 옷이 차고 넘쳐나지만 막상 외출할 때는 입을 게 없다. 이것이 아마 결핍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신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핸드백, 신발··· 패션의 완성을 위해 나는 매일 외출 때마다 결핍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나와 비슷한 결핍을 느낄 것이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은 절대적인 궁핍에 놓여 있진 않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상대적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수십억원의 자산가도 더 큰 부자를 보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나은 집,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부를 달성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돼 살벌한 경쟁에 치여 살아간다. SNS를 보면 타인의 화려한 순간이 멋지게 전시돼 나에게 부족한 퍼즐이 무엇인지를 비교하게 한다.
사람들은 ‘결핍’에 매몰돼 있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앞을 보고 달린다. 마치 어두운 터널 안에서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을 좇는 사람처럼 주변의 풍경을 볼 겨를이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빨리 성장하고 단단해지는 성과도 나타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만을 보고 이미 채워진 조각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감사보다 스스로를 불행의 늪으로 몰아세운다. 옆에 누군가가 궁핍에 놓여 있는지, 아파하는지,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열심히 결핍을 채워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 게으름의 결과라며 손쉽게 외면한다. 결국 결핍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불행함을 가득 안고 살아간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인 친구도 자신에게 부족한 조각만을 바라봐 더 불행해 보였다.
이제 한 해의 달력이 한 장만 남았다. 한 해가 무척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다. 날씨는 칼바람이 불지만 신기하게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 우리 마음의 온도는 따뜻하게 올라간다. 그나마 이웃의 궁핍과 주변 사람의 허기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의 품이 생기는 시기가 이때인 듯하다.
왜일까?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성찰하고, 의미 있는 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내 안에 엄청나게 자리 잡은 결핍감을 덜어내고 마음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의 결핍을 돌보는 사회에선 결핍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받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회에서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 크게 본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고 이웃과 사회의 행복과 안전이 결국 나의 행복과 안전에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만의 직진을 멈추고 옆도 볼 수 있는 행동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따뜻함과 넉넉함이 늘 연말연시만 같아라~.
여성경제신문 손민원 성ㆍ인권 강사 qlov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