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더봄] 단풍의 절정을 마주한 시간

[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조금 늦게 다가온 가을 단풍을 오랜 친구들과 산책하며 즐겼다

2025-11-18     김현주 공공기관인, 전 매거진 편집장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가을 /사진=김지현

‘단풍이 절정’은 이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부터 동네 뒷산, 공원과 집 앞 가로수까지 울긋불긋 고운 이불을 덮어쓴 것처럼 색 잔치다.

산의 약 20%가 물들면 첫 단풍이 들었다고 말하고, 80% 정도가 물들었을 때를 절정이라 한다니 앞으로 며칠간 붉게 물든 나뭇잎들을 바짝 감상해야 한다. 올해는 늦더위로 예년보다 1주일 이상 단풍 드는 시기가 늦었다고 하니 가을과 동격인 단풍을 기다렸던 마음과 금방 사라질 거라는 아쉬움에 이 시간이 귀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단풍은 날씨의 변화로 식물의 녹색 잎이 붉은색이나 노란색, 갈색으로 물드는 현상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은 초록색을 띠며 성장하던 나무가 잎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보통 하루 최저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시작되는데, 해가 짧아지는 이때가 되면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에 떨겨가 생기고 이를 통해 나무는 잎으로 가는 수분과 영양 공급을 줄이게 된다. 이때 잎에서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양분도 줄기로 이동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잎의 산성도를 증가시켜 엽록소가 분해되고 이전에는 엽록소에 가려서 볼 수 없었던 나뭇잎의 또 다른 색소들을 육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시인 도종환은 이런 나무와 단풍의 속성을 ‘단풍드는 날’이란 시로 적어낸다.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속성을 알고 읽으니 단풍의 아름다움이 더 애틋하다.  

이 멋진 단풍을 제대로 못 보고 지나가나 싶었는데 반가운 약속이 생겼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오래전 직장동료의 모임인데 그날은 한 선배가 딸 결혼식을 마친 후 화답으로 점심 자리를 마련했다.

<라벨르>라는 지금은 없어진 여성잡지를 만들던 선후배들인데 30여 년 전부터 알게 된 사이라 그런지 만나서 떠들다 보면 에너지 가득했던 20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물론 건강과 아이들의 진학, 결혼까지 화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좌충우돌하던 서로의 젊은 날을 기억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서울성공회성당 옆 세실마루로 향했다. /사진=김지현

광화문 카페에 모여 와플과 커피를 나눈 우리는 덕수궁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마침 단풍이 절정인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덕수궁길은 덕수궁 돌담과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어우러진 가을 단풍길로 서울 도심에서 단풍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주말이라 우리처럼 궁 안팎을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 이들이 가득했다. 덕수궁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단풍이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에 위치한 정동 전망대인데 덕수궁과 서울시청, 서울광장 등이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높은 빌딩 속 고즈넉한 궁, 그 안을 색으로 채우고 있는 단풍들이 정말 장관이었다. 창을 따라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며 서울의 가을을 눈에 담았다. 이 전망대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공공장소로 관람은 무료이고 카페도 있어 차 한잔 마시며 여유 있게 서울의 계절을 감상할 수 있으니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이다.

내친김에 서울성공회성당 앞 옥상정원으로 향했다. 조금 더 낮은 조망으로 단풍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덕수궁 옆 세실극장 입구에 마련된 별도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시민들에게 개방된 세실극장 옥상 세실마루가 나온다.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배경으로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8명의 중년 여성들이 까르르 웃으며 몰려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자청해 찍어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팔다리를 뻗고 하트를 그리는 등 천진하게 포즈를 취하면서 문득 긴 시간을 지나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인연들이 고맙고 소중하다 싶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의 / 황홀한 웃음에 취해 / 남은 세월 모두가 /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이해인 시인의 ‘단풍나무 아래서’) 딱 우리의 모습이었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주 공공기관인, 전 매거진 편집장 hyunjoo7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