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영 더봄] 세계 음식의 트렌드(2)-한식의 새로운 길
[전지영의 세계음식이야기] 지역 식재료를 사용하는 레스토랑 기술과 미식의 융합, ‘테크노 푸드' 한식 ‘지속 가능한 정성’의 재발견
요즘 전 세계의 식탁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왜 먹느냐’가 중요한 시대다. 식사는 더 이상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지구 환경과 사회적 책임이 반영된 하나의 행동이 되었다.
미식의 중심지였던 유럽과 미국의 레스토랑들은 이제 ‘맛’보다 ‘가치’를 내세우며 채식 위주의 메뉴, 지역 순환형 식재료,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철학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레스토랑 ‘Silo’는 세계 최초의 음식물쓰레기 제로 레스토랑을 선언했다. 모든 재료는 지역 농가로부터 공수되고, 음식물 쓰레기는 퇴비화된다.
뉴욕의 ‘Blue Hill at Stone Barns’는 농장과 레스토랑을 하나로 묶어 생산·조리·소비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새로운 유행이 아니다. 기후 위기와 식량문제, 그리고 윤리적 소비의식이 만든 거대한 흐름이다.
이제 세계의 레스토랑은 미식의 실험실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실천의 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자연과 순환을 중심에 두었던 한식은 이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지역 식재료를 사용하는 레스토랑
지금 세계 외식업의 가장 큰 키워드는 ‘로컬(Local)’이다. ‘멀리서 온 재료보다, 바로 곁의 재료를 존중하자’는 철학은 환경보호뿐 아니라 지역 경제 회복의 의미까지 품고 있다.
프랑스 남부의 ‘Mirazur’는 자급자족형 레스토랑으로, 메뉴의 90% 이상을 레스토랑 뒤편 언덕 밭에서 수확한 재료로 만든다.
일본 홋카이도의 ‘Haku’ 레스토랑은 ‘눈으로 덮인 섬의 계절’을 주제로 각 계절에만 존재하는 식재료를 사용해 요리의 리듬을 만든다.
이런 ‘지역 중심 미식’은 단순한 신선함을 넘어, 음식이 가진 스토리와 지역의 특성을 함께 즐기게 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강릉의 카페들은 지역 커피, 로컬 디저트, 농가 직거래를 내세우며 관광객과 상생하고, 전주의 레스토랑은 ‘전북 로컬 코스’를 통해 지역의 제철 식문화를 알린다.
‘로컬푸드 카페’, ‘지역 농산물 셰프 테이블’이 등장하면서 한식도 점점 ‘지역의 얼굴’을 가진 음식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기술과 미식의 융합, ‘테크노 푸드’
AI 셰프, 로봇 바리스타, 3D 프린팅 초콜릿 등 이제 음식의 경계는 주방을 넘어 데이터와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은 인공지능을 통해 개인 맞춤형 식단을 제안하고, 싱가포르에서는 배양육 레스토랑이 합법화되었다.
기술은 음식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바꾸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교토의 한 전통 장류 제조소는 발효 중 온도·습도를 AI로 실시간 조절해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AI 기반 레시피 추천 시스템을 도입해 지역별, 계절별, 고객 취향에 따라 메뉴를 바꾼다.
한식 역시 발효, 저장, 숙성 같은 ‘시간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된장, 간장, 김치, 젓갈은 모두 미생물과 자연이 만든 예술이다.
이 전통의 과학적 원리를 데이터화하고, 스마트 조리 기술로 발전시킨다면, 한식은 세계 미식의 미래형 모델이 될 수 있다. 한식의 ‘정성’과 기술의 ‘정확함’이 만날 때, 지속 가능한 맛의 길이 열린다.
한식 ‘지속 가능한 정성’의 재발견
한식은 본래 ‘지속 가능성’의 DNA를 품고 있다. 자연의 순환에 맞춰 먹고, 남은 음식은 다시 쓰며, 한 그릇의 밥상 안에 계절과 땅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봄에는 새순을, 여름에는 냉채를, 가을에는 버섯을, 겨울에는 장아찌를 올리던 조상들의 밥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생태계였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빨리, 많이, 편리하게’라는 효율의 논리에 길들었다. 음식은 자연에서 멀어지고, 식탁은 공장에서 온 냉동 식재료와 일회용 포장으로 채워졌다.
이제 세계 미식의 중심이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으로 옮겨가면서, 한식은 다시 본래의 철학으로 돌아가야 할 때를 맞고 있다. 결국 한식의 미래는 ‘과거로부터 배운 지속 가능성’을 현대의 기술과 감성으로 다시 풀어내는 데 있다.
지속 가능한 한식은 단지 친환경적인 음식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지역과 세계가 이어지는 관계의 복원이다.
한때는 세계의 미식이 서양의 식탁을 중심으로 흘렀지만, 이제는 동양의 철학, 특히 한식의 절제와 순환의 미학이 주목받고 있다. ‘덜어냄의 미학’, ‘시간이 만드는 맛’, ‘공유의 문화’ 이 모든 것은 한식이 오래전부터 실천해 온 가치다.
지금 세계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음식문화’는 사실 한식이 수백 년간 지켜온 생활의 지혜와 닮았다. 한식이 이 시대의 언어로 그것을 다시 말할 때, 우리는 세계의 식탁에서 가장 앞선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미래가 밥 한 그릇 위에서 시작된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한식이 세계를 향해 내놓을 다음 시대의 맛이다.
여성경제신문 전지영 푸드칼럼니스트(foodnetwork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