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아말피 해안의 노래 – 포지타노에서 라벨로까지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23) 포지타노, 그림엽서 속의 현실판 신의 길과 오디세우스의 노래 라벨로, 음악이 머무는 언덕
폼페이에서 삼일 밤을 묵게 될 줄은 몰랐다. 원래 하루만 머물 생각이었는데, 너무 덥다고 너무 변해버렸다고 불평하면서도 도시의 매력이라는 게 그랬다. 익숙했고 편해져서 떠날 때쯤에는 숙소 고양이도 이제 나를 알아보고 아침 인사를 하러 텐트에 들르곤 했다.
짐을 싣고 포지타노로 방향을 잡았다. 남쪽 길로 들어서면서 바로 바다가 보였다. 소렌토의 짙은 푸른빛에 눈이 부셔 참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남자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바닷물은 믿을 수 없이 영롱하게 맑게 빛나는데 물 위에 뜬 그의 등 근육이 윤슬처럼 반짝였다.
바다 수영. 꿈도 꿔보지 못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집에 돌아가면 수영을 등록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등록은 하지 않았다. 인간의 다짐이란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 즉흥적이고, 귀엽게 사라진다.)
포지타노, 그림엽서 속의 현실판
길은 점점 꼬불거리고, 차는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경치는 정말이지 말로 설명이 안 된다. 포지타노는 하늘에서 색연필 뭉치를 떨어트려 색색의 그것들이 언덕에 달라붙어 그대로 마을이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선물로 받았던 120색 왕자 크레파스를 떠올렸다. 멀리서 보면 그림 팔레트, 혹은 세상의 모든 색이 들어간 엽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오르막, 계단, 땀, 그리고 관광객과 유로(€)다. 도자기 가게마다 레몬 그림이 그려져 있고,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무심히 “와, 예쁘다”를 외친다.
이 마을은 원래 산비탈을 가꾸어 레몬을 키우던 농부들 삶의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레몬 향 나는 숙박업소’의 집합체가 몰려있는 언덕이다. 그 생각을 하니 아름다움도 어쩐지 피로하다. 모두 크고 작은 호텔이고 바다를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뷰 맛집’들은 그 뷰에 웃돈을 요구하는 숙박업소 언덕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진짜의 삶을 살아가는 걸까? 세상은 너무 열심히 ‘인스타그램용 풍경’만을 요구하고 만들어낸다.
신의 길과 오디세우스의 노래
나는 아말피 해안을 따라 달리며 라벨로를 가기로 했고 미 선배는 ‘신의 길(Sentiero degli Dei)’을 걸으러 가겠다고 했다. 지난번 여행에서 이미 길을 걸었으므로 트레킹을 시작하는 지점에 미 선배를 내려두고 나와 후니는 차로 향했다.
신의 길에는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세이렌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육지로 이용해 건넜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다. 운전대 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바다를 보며,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세이렌의 노래 들으면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만다는 그 유혹의 노래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나 뭐라나. 자기 몸을 돛대에 묶게 하고 모든 선원의 귀를 막은 후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절대로 나를 풀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결국 인간의 호기심이란, 목숨 걸고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은 음악 같은 것 아닐까.
우리는 한순간도 주의를 놓치면 안 되는 아슬아슬한 해안 절벽 길을 넘었다. 세이렌 대신 내비게이션 음성에 의지해 아말피를 통과했다. 아름답지만··· 다시 그 길을 운전하고 싶진 않다. “경치와 멀미는 정비례한다”는 진리를 체험했다.
라벨로, 음악이 머무는 언덕
라벨로에 도착했을 때, 모든 소음이 멈췄다. 도시의 소란이 아래로 가라앉고, 바람만이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가 <파르지팔(Parsifal)>의 영감을 얻은 곳이다.
1880년, 그는 라벨로의 빌라 루폴로(Villa Rufolo) 정원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지.
“Hier finde ich den Zaubergarten meines Parsifal.”
“여기에서 나는 ‘파르지팔’의 마법의 정원을 발견했다.”
그 정원은 지금도 마법 같다. 바다를 향해 열린 테라스에 서면, 멀리 지중해가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지고, 바람 속에는 현악기의 잔향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잠시 상상했다. — 아마도 바그너는 이 정원에서 악보 대신 바람을 읽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의 나는 ‘카페 라테 한 잔 9유로’라는 너무나 현실적인 악보를 읽고 있었다.
라벨로 음악제 무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했다. 매년 여름, 전 세계 연주자들이 와서 그가 남긴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날은 공연이 없었지만, 공기 자체가 음악이었다. 정원에 앉아 있는데 마치 새들도 박자를 맞추듯 날았다. 그래선지 막귀인 내 귀에도 바람은 음정을 가지고 있었다.
햇살이 낮게 깔리며, 포지타노의 인파도, 아말피의 혼잡도 모두 멀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바그너가 라벨로에서 찾은 건 아마 ‘음악의 영감’보다 ‘세상의 소음에서의 해방’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뭐에 취했는지 사진도 몇 장 안 찍었네."
사진쟁이 후니에게는 예외적인 날이었다.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 흐르는 어떤 선율 하나가 있었을까? 그것이 하루의 전리품이다. 난 여전히 생각한다. — 그래, 진짜로 수영을 배워야겠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