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내 눈에 콩깍지가 벗겨지는 날이 홀로서기 첫날

[송미옥의 살다보면2] 영원히 변함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틀니 빼고 개량한복 입은 모습에 놀라 주저앉아 울었다···당시 70세였는데

2025-11-09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십 년 전만 해도 편지를 쓰곤 했는데 이젠 손 편지를 쓴다는 게 어색하고 부칠 곳도 없어졌다. 내 젊은 시절 아버지의 손 편지는 내 삶에 등불이 되어 주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복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던 앞집 아저씨가 퇴원하셨다.

문안 인사 겸 들어서니 아저씨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해 바라기를 하고 있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그런지 늘 큰소리치던 그분의 표정이 뭐랄까, 어릴 적 부모에게 된통 혼난 표정처럼 겸연쩍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하신다. 마당 한쪽에 팽개쳐진 고추 지지대가 왜?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 나이 40대 가장 바쁜 시절에도 틈만 나면 친정에 들러 아버지를 뵙고 오곤 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에겐 우주이신 나의 아버지는 살갑기는커녕 말씀도 별로 없으셨지만 가끔 편지로 안부를 전해주셨다.

나는 그 어떤 말보다 우체통으로 전해지는 그 말씀이 좋았다. 힘든 일을 겪을 때도 나는 아버지를 보면 해답을 얻고 기운이 났다. 나에게 아버지는 그냥 아빠가 아닌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다음 서열로 늙지도 죽지도 않고 나를 지켜주실 분이라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불시에 방문을 하니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올백 머리를 하고 흐트러짐 없는 당신의 모습은 어디 가고 후줄근한 개량 한복에 머리는 수건을 동여매고 거기에 틀니까지 뺀 모습은 너무너무 낯설었다.

그날에서야 아버지의 치아가 틀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아버지의 독특한 올백 머리는 머리를 감은 후 수건을 둘러 묶고 그렇게 잠재워 만든 아버지만의 스타일이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그 편한 한복을 우격다짐하듯 일상복으로 갈아입게 하고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지금 생각해도 멋쩍고 우스운 시간이었다. 나의 억지에 암말 없이 옷을 갈아입으시고는 이제 됐어? 하시며 미소 짓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개량 한복이 편한 옷이란 걸 왜 모르겠나. 아버지 손을 잡고 집 앞 시장을 마실 다니던 올케에게, 딸이냐고 묻는 한복집 어른의 말이 기분 좋아 한 벌 사신 거란 걸, 그래서 내가 떠나면 다시 갈아입고 퇴근하는 올케의 환한 얼굴을 맞이하실 거란 걸···. 서열 높은 아버지도 자식 눈치를 보셨다. 당시 아버지 연세는 70세였다.

생각해 보면 요즘은 임플란트에 성형미용에 신기술의 치장으로 겉모습은 늙지 않는다. 이 몸이 죽어 화장되면 쇠(임플란트) 사리가 우르르 나올 거라며 친구들과 농담하지만, 몸은 나이를 안다.

하루해가 지면 온몸이 로봇처럼 삐걱거리고 안 아픈 곳이 없으니 날마다 내일은 침이라도 맞으러 가보리라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아침이 오면 이것만 이것만 하고 미루다가 다시 저녁이 온다. 그러니 이 정도의 고통은 모두 안고 산다는 거다. 나는 날마다 오천 보 걷기라도 실행하며 자식들 앞에서 건강하게 보이려고 애쓴다.

나이 들어서도 건강을 서로 챙겨주며 사시는 어른들을 뵈면 참 보기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마당에 나온 아저씨가 어지럼증을 이겨내느라 고추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 걸으셨나 보다. 언니가 투덜거리며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여간 화가 난 게 아니다.

“당신이 노인네여? 어이? 벌써 지팡이를 짚게, 어이?”

나는 풋~ 하고 웃음이 터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흐미, 곧 팔십 줄에 들어설 남편이 노인이 아니면 뭐시여? 흐흐흐···’

나는 두 분에게서 젊은 날 아버지를 향한 내 눈의 콩깍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듯이, 그렇게 오래오래 최면을 걸었듯이···.

젊은 시절 패기 있고 힘 있던 모습으로 오래 함께하길 바라는 언니의 마음이겠지. 그래도 넘어지면 어쩌려고··· 슬쩍 모른 척해주지, 참나~!

좋은 일 하다가 혼난 고추작대기를 슬그머니 주워 어른 옆에 다시 세워놓았다. 빨리 회복하시길 바라는 내 마음을 토닥토닥 얹어 본다.

여성경제신문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