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미 더봄] 왕관의 귀환, 세계가 신라 금관을 다시 보다

[민은미의 보석상자] (110) 트럼프 AI 영상이 불러낸 황금의 나라 신라 금관, 이제는 월드 스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개최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

2025-11-08     민은미 주얼리 칼럼니스트
‘천마총 금관’ 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에서 열린 APEC 2025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신라 금관 복제품이 선물로 전달됐다. 미국에서 '노 킹스' 시위가 한창인 시점에서 트럼프가 왕권을 상징하는 금관을 선물로 받자,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 위에 신라 금관을 합성한 이미지와 영상들이 쏟아졌다.

그 장면은 순식간에 SNS를 타고 전 세계를 뒤흔들며, 트럼프 왕관 합성 영상은 정치 풍자와 뉴스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해프닝 덕분에 잊혔던 우리의 문화유산을 세계가 다시 조명하고 주목하게 되었다. 신라 금관의 역설적 승리였다.

트럼프에게 선물한 왕관은 천마총 금관을 본뜬 복제품으로 현존하는 6점의 금관 중 크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 금관은 고대 왕권의 상징으로 왕권의 권위는 황금의 화려함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그 안에는 자연과 인간, 하늘을 잇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황남대총 금관’ 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가지처럼 뻗은 세 갈래의 장식은 하늘과 생명을 상징하고, 사슴뿔 형태의 장식은 풍요와 재생을 의미한다. 왕은 금관을 통해 자연의 질서와 신성함을 머리에 이고, 그 안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얻었다. 얇은 금판을 절묘하게 절단하고 불과 망치로 이어 붙인 세공 기술은 오늘날에도 경이롭다. 그래서 신라 금관은 한 시대의 세계관과 미학이 응축된 예술적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몇 해 전 책을 집필하며 신라 금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금관의 미적 구조와 기술적 특징을 유럽의 왕관들과 비교해 서술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해외의 왕관들은 고화질 이미지와 문헌으로 연구가 풍성하지만, 우리의 금관은 자료가 제한적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일부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금세공 기술을 가진 민족이었음에도 정작 우리 자신은 그 가치를 잘 모른다는 것을.

금관이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모습 /연합뉴스

이번 APEC과 함께 열리는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Silla Gold Crowns: Power and Prestige)은 그러한 지난 아쉬움을 뒤집는 뜻깊은 전환점이다. 전시회는 APEC 2025 정상회의 공식 문화 행사로 기획되었고, 기간은 10월 28일 ~ 12월 14일까지다. 일반 관람은 11월 2일부터 가능하다.

이번 특별전의 가장 큰 의의는 최초로 신라 황금 문화를 대표하는 여섯 점의 금관과 여섯 점의 금 허리띠를 한자리에서 직접 비교하며 집중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전시라는 점이다. 기존에는 각 금관이 서로 다른 기관에 분산되어 있어 상호 비교가 어려웠으나, 이번 전시를 통해 형태·양식·장식의 차이와 변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금관총 금관’ 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대표 전시품으로, 최초로 발굴된 국보 금관총 금관과 금 허리띠부터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과 금 허리띠, 국보 천마총 금관과 금 허리띠, 보물 서봉총 금관과 금 허리띠, 보물 금령총 금관과 금 허리띠, 보물 황남대총 남분 금 허리띠, 교동 금관까지 신라 금관과 금 허리띠 각각 여섯 점이 모두 공개된다.

황금의 나라 신라가 남긴 장엄한 미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최신 디지털 기술로 금관의 미세한 질감과 구조를 재현해 냈다는 점이 특징이다. 관람객들이 고분 속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예술로서의 금관을 만날 수 있게 됐다.

‘금제 허리띠’ 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이번 APEC은 자각의 순간이었다. 천오백 년의 세월을 건너 되살아난 우리의 문화가 세상과 다시 만나게 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세계가 트럼프가 쓴 신라 금관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보았다. 정치적 풍자로 시작된 장면들이 결국 문화의 힘으로 귀결된 반전의 서사였다.

이제는 황금빛 유산, 신라 금관을 우리가 먼저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다. 트럼프의 머리 위에 올려졌던 그 왕관은 사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있었다.

여성경제신문 민은미 주얼리 칼럼니스트 mia.min123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