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사, 글로벌 AI 독립 여건 갖추고도 투자는 정반대로 종속 지향
외부 솔루션 의존, 규제와 보안 벽 막혀 국내 은행 자국 데이터 학습 가능 구조 카카오·네이버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 제이미 다이먼 ‘금융 AGI’론 방향 잃어
한국 금융권이 글로벌 금융 인공지능(AI)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 노선을 선언할 조건을 이미 갖췄다는 분석이 나온다. 외국계 솔루션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은 규제·보안·언어 장벽으로 인해 효과는 제한적인 반면 비용과 위험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행 금융보안 규정상 고객 데이터의 외부 클라우드 반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외부 AI 솔루션을 적용하려면 온프레미스 전환과 추가 보안 설계가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라이선스와 커스터마이징 비용이 급증하면서, 월가식 ‘외삽 모델(extrapolative model)’은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20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금융권은 이미 자체적으로 쌓아온 규제 준수 경험과 언어 데이터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금융시스템과 자금세탁방지(AML) 체계는 글로벌 수준을 넘어서는 통제력을 보여주며, 내부 데이터만으로 금융 AI를 훈련할 수 있는 기반이 충분하다.
한때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금융 AGI’라는 거대한 비전을 내세웠다. 시장의 모든 변동과 리스크를 통합 AI로 예측·관리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금융 데이터는 국가별 보안 규제에 묶여 있어 단일 초지능 모델을 구성할 수 없었고, 다이먼의 방향은 통합 AI가 아닌 인프라 확충으로 바뀌었다. 결국 “AI로 금융을 예측한다”는 구상은 “AI 산업을 위한 전력망을 확충한다”는 투자 계획으로 축소됐다.
결정적 한계는 금융 데이터의 ‘비공개성’이었다. 충분한 거래·리스크 데이터를 외부로 내보내지 못하자, JP모건은 알고리즘 성능 향상 대신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게이트’ 구상에 맞춰 그래픽처리장치(GPU) 클러스터 확보와 반도체 투자로 선회했다. 이 결과 ‘금융 AGI’는 개념만 남게 됐다는 분석이다.
반면 한국 금융권은 보안망 내부에서 자체 데이터를 학습시킬 수 있는 구조를 이미 구축했다. 5대 시중은행은 보이스피싱 탐지에 인공지능을 적용하며 자사 데이터를 직접 학습·운용하는 체계를 갖췄다. 국민은행은 AI 모니터링 인력을 확대했고, 하나은행은 합성곱신경망(CNN) 기반 부정거래 탐지(FDS)를 운영 중이다. 신한·우리·농협은행도 금융보안원·경찰청과의 연동을 통해 외부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지능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빅테크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스템이 고객 보호 기술을 넘어 ‘AI 금융 주권’의 출발점으로 해석한다. 내부 데이터로 정교한 탐지와 대응을 수행하며, 금융보안 규제·AML 체계·언어 데이터 자산을 모두 갖춘 한국 금융은 이미 자생 가능한 기술 생태계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금융정보의 내재적 보안성과 언어적 맥락을 함께 지키는 주권적 선택이 가능해졌다.
전문가들은 한국 금융권의 다음 과제가 ‘비(非) LLM 영역의 소버린 AI’를 현실화하는 데 있다고 본다. 실제 범(汎)인공지능(AGI)급 모델은 비용·보안·언어 정확도 면에서 금융권에 적합하지 않다. 대신 은행·보험·증권 등 각 분야별로 한정된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도메인 특화 AI가 실질적인 해법이라는 것이다.
고객 응대나 리스크 관리 같은 정형 업무는 LLM이 아닌 규칙 기반과 통계 모델의 결합으로 더 높은 효율을 낸다. 이러한 구조는 덩치만 요란한 AGI보다는 ‘자기지능(Self-contained Intelligence)’에 가깝고, 각 기관의 내부망 안에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소버린형 AI의 방향과 일치한다.
결국 금융권 AI 진화의 핵심은 ‘모델 경쟁’이 아닌 ‘프라이버시·보안·언어 인프라’의 경쟁이다. 데이터 결합·암호화 기술을 접목한 연합학습(Federated Learning), 제로트러스트 보안망, 국가 언어모델 게이트웨이 같은 인프라가 금융 소버린 AI의 실질적 주춧돌이 될 전망이다. 외부의 지능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언어와 데이터 위에서 안정적으로 사고하는 시스템이 ‘소버린 AI’의 진짜 모습이다.
다만 자본시장에선 이재명 정부의 ‘파운데이션 AI’ 개발 구상을 ‘소버린 AI’ 정책으로 오인하며 엇박자를 보이고 있다. 신한·하나자산운용 등 금융지주 계열 자산운용사들은 정부 기조에 맞춘 듯 ‘AI 테마 ETF’를 잇달아 내놓고 있지만, 실상은 카카오·네이버 등 민간 소프트웨어 기업 중심의 투자 상품에 불과하다. 이들이 출시한 ETF는 테마 수익 추종형 상품으로, 인공지능 트렌드와 본질적인 거리가 있다.
금융권 한 보안 전문가는 “한국 금융권이 글로벌 AGI 담론에 손을 내미는 것은 기술 협력이 아니라 주권의 양도에 가깝다”며 “이미 각 은행이 자국어 기반 데이터로 학습한 AI를 보유한 상황에서 외부 모델의 결합은 효율이 아니라 침투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