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이 더봄] 광주리 채우러 나갈 시간

[최진이의 아취 단상(雅趣 斷想)] 10월의 사물, 광주리 추석은 사전 회식 진짜 추수는 추석 이후부터

2025-10-16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어정 7월, 건들 8월, 동동 9월을 지나 상(上)달 10월이 되었다. 

농사의 일 년 사이클(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재배와 관리를 하고, 가을에는 수확을, 겨울에는 다음 해 농사를 위해 쉬어가며 준비)을 교과서로 배운 서울 촌년에게도 농가의 시간 구분이 제법 와닿는다. 

옆에 있는 누군가에 의할 때도 있었지만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불쾌지수가 올라갔던, 질리도록 덥고 습했던 여름에는 도저히 빠릿빠릿할 수 없는 정신과 신체로 인해 어정거리며 건들거리며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바람이 시원해져 9월에는 심어놓은 열매도 없는데 무엇을 따려는지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녔는데, 돌아보니 10월 중순이 되어있다. 

농가에서는 추수가 끝나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한가해져 상(上)달 10월이라고 불렀다. 정말 그렇다. 가을 저녁, 추석(秋夕)에는 맛있는 과일도, 잘 익은 곡식도, 추수의 계절과 관계없는 간식도, 가족과 친구들이 만나 서로 주고받은 선물도 가득하다. 품에 안기지 않는 커다란 광주리로도 모자란 계절이다. 

2025년 프레스 모멘트 10월 달력 /프레스 모멘트

그러나 농가와 나의 10월은 다르게 느껴진다. 농가에서는 신선놀음하는 동안, 나는 끝나지 않는 노예의 역사를 내 한 몸으로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분주하기 짝이 없는 10월이다. (물론 실제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는 추석 전후가 추수와 더불어 유통과 판매로 인한 노동의 집약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추석 연휴 동안 아이들과 집안일에 몸이 메어있으면서 마음의 분주함은 폭주 기관차처럼 혼자 달려가고 있다. 추석 당일이 이틀 지나 구름 사이로 겨우 만난 보름달에 물어보고 빌어보았다. 나의 추수는 언제쯤일지, 나의 광주리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 채울 게 있기는 할지…연말이 다가올수록 우울해지고 불안해지는 연말 증후군이 벌써 시작된 기분이다. 

날이 흐려 추석 당일에는 볼 수 없었지만, 연휴 기간 중 보았던 보름달 /프레스 모멘트

이런 걱정과 푸념으로 나의 광주리를 채우며 추석을 지내다가 잊고 지내던 사실이 떠올랐다. 추석을 외국인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빗대어 이야기했었는데, 실은 두 명절의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1년 동안 추수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제를 올리는 것이라면, 추석은 추수하기 전 미리 곡식을 걷어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자리인 것이다. 추석쯤에는 대부분의 곡식이나 과일들이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이다. 가을 추수라는 큰 일을 앞두고 날도 좋으니 미리 성묘도 하고 놀면서 즐기는 명절, 추석은 사전 회식인 셈이다. 

이걸 알고 나니 왠지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10월인데도 내 광주리가 차지 않았다고 걱정하거나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심지어 '사전 회식을 좀 더 즐길걸'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제 막 추석을 보냈으니 나는 내 빈 광주리에 새참을 담아서 추수하러 나가면 되는 거다. 이왕이면 새참을 챙길 때 누군가를 위한 여유분도 챙겨야겠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조금은 바라보며···.

새참 광주리와 그릇 /국립민속박물관

여성경제신문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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