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세의 실버타운 탐방기] 6.라우어 ③ 라우어의 아침을 노래하는 사람, 권혁명 단장
성공한 기업인의 인생 두번째 무대 골프장의 챔피언에서 라우어의 단장으로 화음 속에서 다시 찾은 삶의 리듬
필자는 전국의 실버타운을 조사해 <실버타운 사용 설명서> 책에서 34곳을 분석했지만 숫자로 정리된 정보만으로는 실버타운의 진짜 모습을 다 담을 수 없었다. 실버타운의 가치는 결국 '사람'에서 나온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입주민들의 삶 운영자의 철학 그리고 실버타운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모여야 비로소 한 곳의 실버타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탐방기는 직접 현장을 방문해 운영 책임자나 입주민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실버타운의 실상을 전하고자 한다.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과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버타운의 면면을 풀어낼 계획이다.
부산 기업가, 실버타운의 새로운 무대에 서다
권 단장은 평생을 제조업에 몸담은 부산의 기업인이다. 젊은 시절 세 개의 법인을 설립했고 지금도 두 곳의 대표이사로 기업을 경영중이다. 매일 출근은 하지 않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은 회사를 방문해 전체적인 운영상황을 챙긴다.
라우어에 입주한 이유는 단지 나이 때문이 아니었다. 서울의 병원에 입원 중인 아내가 퇴원하면 함께 지낼 새로운 공간을 찾던 중 부산 오시리아에 리조트형 실버타운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아내가 건강에서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운동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집에 도우미가 있어도 도우미가 아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편한 살림보다 아내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골프채 대신 악보를 든 남자
권 단장의 오랜 취미는 골프였다. 부산컨트리클럽 대표 선수로 20년을 활동할 만큼 실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라우어에 입주한 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골프채 대신 악보를 손에 들고 필드 대신 무대 위에서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했다.
그는 음악과는 오랜 인연이 있었다.
“성악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젊을 때부터 음악을 참 좋아했습니다. 색소폰을 30년 넘게 연주했죠. 그게 제 인생의 쉼표였어요.”
라우어에서 합창단 창단 공지가 올라왔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합창단은 2024년 봄 라우어 입주 1년 전부터 결성되었다. 그는 금년 1월부터 단장의 임무를 맡아 단원의 결속과 추가모집부터 연습까지 체계를 세웠다. 회비를 걷고 지휘자와 반주자를 섭외하고 프로그램을 짜는 일까지 직접 맡았다. “회사를 운영하듯 합창단을 운영한다”고 그는 웃었다. 권 단장은 매주 목요일 연습 시작 30분 전에는 항상 먼저 도착해 의자를 정리하고 단원들을 위해 준비를 한다.
연습이 있는 날이면 그는 하루 일정을 모두 합창에 맞춘다. 연습 후 단원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저녁에 생맥주를 곁들여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일상 속에서 합창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라우어 생활의 중심이자 그에게 가장 큰 활력의 원천이 되었다.
화음을 맞추며 배우는 삶의 속도
권 단장에게 합창의 매력은 노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합창은 호흡을 조절하고 사람 사이의 간격을 조율하는 과정이며 서로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일이다. 그는 합창을 통해 배려와 조화를 배운다고 말한다.
“합창은 누가 더 잘하느냐보다 누가 더 잘 맞추느냐의 문제죠. 자기 목소리를 조금 낮추거나 옆 사람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 참 인간적입니다.”
라우어 합창단에는 60세부터 86세까지 다양한 연령의 단원이 함께한다. 26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목소리로 노래한다. 각자의 인생과 개성이 다르지만 화음을 맞추기 위해서는 모두가 자신의 음을 조절해야 한다. 그 과정이 바로 합창의 본질이자 공동체의 미학이다.
“우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인생 경험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노래할 때만큼은 모두 같은 음을 찾아가죠. 그게 바로 합창의 힘입니다.”
합창단에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단원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원들이 먼저 나서서 함께 연습하고 실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분이 합창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해요. 오히려 합창이 치매의 진행을 늦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그분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언젠가 우리도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 함께 노래합니다.”
권 단장은 합창이 단순히 음악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 연습이라고 말한다. 화음을 맞추기 위해 서로를 배려하고 약자를 감싸 안으며, 결국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음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는 이 과정을 두고 “라우어 합창단이 품은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지난 6월, 라우어 콘서트홀에서는 합창단의 첫 공식 공연이 열렸다. 300여 명의 입주민이 객석을 가득 메웠고 단복을 차려입은 단원들이 무대 위로 올랐다. 세 곡의 가곡이 끝나자 관객석은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다. 그날의 무대는 단지 음악회가 아니라 라우어라는 공동체가 하나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합창단은 이제 단순한 동호회가 아니라 라우어의 구심점이다. 단원은 46명이며, 이 중 세 쌍의 부부가 함께 활동한다. 나머지는 혼자이거나 부부 중 한 사람만 참여하지만 식당이나 커뮤니티 공간에서 다른 단원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배우자를 소개하며 인사가 이어진다. 그렇게 합창단의 관계는 단원을 넘어 가족으로 확장되어 사람을 이어주고 그 연결이 공동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비우고, 단순하게, 그리고 노래하며 산다
권 단장의 방은 넓지만 물건이 많지 않다. 라우어로 이주하며 대부분의 살림을 정리했고 이전에 거주했던 아파트는 딸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는 짐의 절반 이상을 버리고 남은 물건 중에서도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비웠다. 아내는 처음엔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정리하며 눈물을 글썽였지만 결국 ‘비움’이 주는 편안함을 선택했다.
권 단장은 나이 들어가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을 “비움의 가치”라고 말한다.
“물건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야 나 자신과 남은 시간에 집중할 수 있어요. 합창도 마찬가지예요. 내 목소리만 높이면 화음이 깨지고 너무 약하면 사라집니다. 서로 조금씩 비워야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그에게 라우어는 더 이상 단순한 ‘주거시설’이 아니다. 이곳은 그의 일상, 그리고 음악이 된 공간이다. 아침엔 운동을 하고 낮엔 합창단과 연습을 하며 저녁엔 친구들과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며 리듬처럼 이어져 있다. 지금의 권 단장의 삶은 그 자체로 한 곡의 가곡과 같다.
“노래를 부를 때면 나이를 잊습니다. 음을 맞추고 숨을 고르는 그 순간만큼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죠”
여성경제신문 이한세 객원기자·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외래교수 justin.lee@spireresear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