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의 편한숏] '어쩔수가없다'고 믿기로 한, 믿어야만 하는

영화 '어쩔수가없다' 리뷰 공감과 비판의 줄다리기 시스템에서 학습한 생존법 노동가치 소멸의 종착지점

2025-10-09     박소연 기자

21세기 현대인은 매일 수많은 콘텐츠를 스쳐 지나간다. 그중 어떤 장면은 뜻밖에 발길을 붙잡고, 짧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편한숏'은 그 순간에 주목한다. 이야기 속에서 장면이 품은 감정과 맥락을 읽어낸다. 영화, 드라마, OTT 등 서사가 있는 영상 콘텐츠를 바탕으로 화면 속 짧은 순간을 통해 지금 이 시대와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을 함께 들여다본다.[편집자주]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제목 그 자체가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이자 잔혹한 변명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인간은 얼마나 쉽게 그 말을 믿고, 합리화하며 결국 행동으로 옮기는가. 영화는 한 남자의 균열을 따라가지만 그 여정에 쉽게 동화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관객은 그의 곁이 아니라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주인공 만수는 25년간 일한 제지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재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1년이 넘도록 재취업에 성공하지 못하고 한계에 다다르는 만수. 그는 재취업 자리가 한정되어 있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의 총구는 자신을 해고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에게로 향한다. 

설령 만수가 그 경쟁자들을 모두 없앤다 해도, 자신이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는 선택의 열쇠를 쥔 시스템이 아닌 노동자에게 총구를 겨눈다. 만수는 스스로 만들어낸 전쟁 속에서 싸우며 다치고 금기(술을 마시는 것)를 깬다. 왜곡된 공격의 방향 탓에 결국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빠진 셈이다. 노동자가 시스템이 아닌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또 다른 노동자에게 칼을 들이대며 자멸하는 이 비극을 통해 영화는 경쟁 사회의 근원적인 잔혹함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만수는 무고한 이들을 해치지만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그는 본질적으로 성실하고 미련한 인물이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이를 악물고 구직에 몰두할만큼 성실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전형적인 미련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은 그를 완전히 밀어낼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다. 관객은 만수의 행동을 따라가며 그의 절박함을 이해하다가도  그의 선택이 지나치게 비약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로부터 한 발 멀어진다. 공감이 깨지는 그 순간 ‘어쩔 수 없다’는 말의 잔혹한 진의가 드러난다.

"정말 어쩔 수가 없는가?"라는 질문은 영화의 중반 이후 더욱 선명해진다. 만수가 살인의 정당성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생자인 선출을 죽일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그는 ‘이제 와서 멈추면 앞서 죽은 이들의 희생이 헛되다’고 생각한다. 이미 스스로 만든 논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택하는 순간이다. 생존의 논리가 어떻게 자기 합리화로 변하고 끝내 폭력을 지속시키는 이유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른바 '고추잠자리 시퀀스'는 '프로페셔널이란 이런 것이다'를 시각화한 듯하다. 이병헌, 이성민, 염혜란 배우가 각자의 결을 유지한 채 완벽한 호흡으로 맞선다. 세 명의 장인(匠人)이 각자가 다듬은 칼을 들고 자신만의 장기를 보여주는데 그 칼끝이 단 한 번도 서로를 베거나 침범하지 않는다. 그 결과 무질서한 난투가 아니라, 충돌하는 듯하면서도 치밀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세 배우의 합으로 빚어낸 하나의 완벽한 조각품이 탄생한다. 그 합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기묘하고 독특한 쾌감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만수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가 범모에게 돈이 없으면 집이라도 팔아라, 마트 가서 짐이라도 나르라고 소리치는 순간은 사실은 관객이 만수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만수 스스로가 외면하는 답이다. 합리적인 대안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낡은 체면과 가장으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길을 외면한다. 이처럼 스스로가 아는 진실과 행동의 괴리가 만수라는 인물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킨다.

가장으로서의 체면과 책임감, 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이 한데 얽혀 폭력의 논리가 생긴다. 실직으로 무너졌던 그의 정체성은 가족을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살인이라는 잘못된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가장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가족을 위한다는 행위가 결국 그의 윤리적 파멸을 가속화하는 출발점이 되며 그 와중에 가족으로부터 신뢰까지 얻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통해 영화는 낡고 폭력적인 책임감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드러낸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지점은, 해고된 노동자가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대신 자신과 닮은 노동자를 제거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현실이다. 만수의 폭력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다. 그 누구도 "너희 넷 중 하나만 남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만수는 스스로 그렇게 믿는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누군가 사라져야 한다는 계산을 만수 스스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만수가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선택의 최종 열쇠는 여전히 자신을 해고했듯 언제든 다시 배제할 수 있는 면접관들, 즉 시스템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만수의 선택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광기처럼 보이지만 그 '자의성' 속에는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 숨어 있다. 시스템은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에게 '너만 없으면'이라는 생존 논리를 내재화시킨다. 이로써 노동자는 자본이 아닌 동료와 싸우는 비극적인 구도에 갇힌다. 영화는 이 잔혹한 논리(내가 남으려면 네가 사라져야 한다)를 과장된 전제를 통해 압축한다. 관객이 다소 비현실적이라 느낄 수 있는 이 비약은, 오히려 현실에서 은폐된 경쟁의 잔혹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용해온 생존 윤리를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만수는 마침내 재취업에 성공한다. 제지 공장의 생산은 이제 인간 동료가 아닌 AI가 맡는다. AI는 만수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생산 활동(노동)을 수행하지만 임금을 받거나 정체성을 고민하는 '노동자'가 아니다. 과거 만수가 제거할 수 있었던 경쟁자는 범모, 시조, 선출 등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AI는 제거할 수도 이길 수도 없는 새 시대의 경쟁자이자 절대적인 대체재다.

노동의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막대기로 거대한 제지 롤을 탕탕 두드리며 상태를 체크한다. 하지만 이제 그 행동은 아무 기능도 없는 과거 노동의 관습일 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일의 기능이 아니라 일해야 한다는 습관뿐이다. 결국 그는 노동의 기능은 상실하고 일의 형식만 남은 '노동의 형체'가 되어 공장에 남겨진다.

'어쩔수가없다'는 개인의 체념을 넘어 현실이 은밀히 주입한 생존의 언어다. 영화는 한 가장의 비극적 몰락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무심코 선택하는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정밀하게 비춘다. 만수를 극한으로 이끈 그 논리가 현실 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운명인 한, 만수의 자리는 언제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은 기자 개인의 해석과 감상을 담은 칼럼입니다.

여성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syeon0213@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