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정치In] 감정 정치의 관성,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신율 칼럼] 분노에서 출발 행동 후퇴 몰라 대법원장 청문회 전례 없는 일 어떤 이미지를 쌓느냐가 중요
정치는 이성적 프로세스다. 아니, 이성적 프로세스여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일부 국가의 정치판을 보면 이성은 사라지고 감성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좌파 혹은 좌익을 거론하곤 한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이유는 보수 진영의 결집을 위한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진영 결집을 위한 방법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정책을 통해 보수 이념을 부각시키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택한 방식은 적(敵)의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보수 진영을 결집시키려는 것이다. 물론 미국 내에도 좌익이 존재할 수 있고 일부 사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주장을 하려면 언제나 구체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는 중요한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특히 미국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진영 갈라치기식 발언은 미국 사회를 양분시킬 수 있고 세계적 차원의 진영 논리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국민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감정은 분명 이성보다 강력한 동력을 가진다.
이성에 기반한 행동은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하지만 감정, 특히 분노에서 출발한 행동은 후퇴를 모른다. 정치는 때로 양보하며 물러설 줄 알아야 하는데 감정이 지배하면 정치 그 자체가 파괴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을 봐도 감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재명 정권 들어서 감성화가 두드러진다는 뜻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 시절부터 정치의 감성화는 이미 시작됐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모든 사회적 현상에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관성의 법칙'은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현재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지 자연계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회복지 정책이 그 좋은 사례다. 복지 혜택이 없을 때는 불만이 없지만 일단 시행된 복지가 사라지면 불만이 폭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치의 감성화도 마찬가지다. 한 번 감성화가 시작되면 계속 그 경향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인 조희대 대법원장 청문회 사례도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헌정사상 대법원장을 상대로 한 청문회는 전례가 없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 역시 이런 대법원장 청문회는 사실상 없었다. 이는 삼권분립의 근간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대통령에 대한 재판을 중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욱이 청문회를 개최하는 날은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을 마치고 귀국한 얼마 안 되는 시점이다. 청문회 이슈가 대통령의 순방 성과를 덮어버릴 수 있는 시점이라는 말이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국정 운영의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음에도 여당이 이러한 청문회를 강행한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전산실 화재로 인해 국민들이 불편과 불안을 겪는 상황까지 겹친 점을 고려하면 여당의 대응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러한 상황의 배경에는 정치판을 지배하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감정이 앞서는 정치에서는 여당이 본연의 역할조차 뒤로 미루게 된다. 이는 여권 전체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감정에 기반한 정치는 결국 여권을 곤경에 빠뜨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당이 지금 인식해야 할 것은 침묵하는 다수의 국민이, 목소리 큰 강성 지지층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이들의 침묵을 무시하고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만 좇는다면 다음 지방선거에서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정치 지형을 보면 민주당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년 지방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이 워낙 지리멸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리한 상황에 안주해 민주당이 감성에 치우친 정치를 계속한다면 그 이점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떤 이미지를 쌓아가느냐가 상황적 유리함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이 다시금 이성에 기반한 합리성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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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세계지역학회 부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총무이사
통일부 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