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WTO 개도국 특혜 포기 선언은 '생색내기' 이벤트

APEC 미중 정상회담 앞둔 유화 제스처 美 우회 비판해 국제사회 내 입지 확대 中 저가 중간재·원자재 조달 비용 부담 "개도국 지위 포기, 정치적 상징 행위"

2025-09-26     김성하 기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AFP=연합뉴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개발도상국에 부여되는 특별·차등대우(S&DT)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유화 제스처라는 해석이 우세한 가운데 업계는 한국 경제에 미치는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26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리청강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담판대표 겸 차관은 이번 선언과 관련해 "국제·국내 양대 국면을 고려해 외부에 천명한 중요한 입장"이라며 "다자무역체제를 확고히 지키고 글로벌 발전과 협력을 적극 이행하는 조치로 세계 무역·투자 자유화를 촉진하는 강심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도 버텨온 중국이 돌연 입장을 선회한 배경에는 내달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유화 제스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집권 1기 당시 'WTO 개도국 지위 개혁'을 공식 발표하며 중국·한국·싱가포르 등 7개국을 지목했다. 그는 "사실상 선진국임에도 WTO에서 개도국 특혜를 누리는 등 제도 남용이 벌어지고 있다"라며 "90일 내 자발적으로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협상에서 개도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라고 압박한 바 있다.

한국은 1995년 WTO 가입과 함께 개도국을 선언했으나 약 25년 만인 2019년 10월 지위를 공식 포기했다. 아랍에미리트(UAE)도 2020년 초 지위를 내려놓았지만 중국을 포함한 나머지 5개국은 유지해 왔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 /AP=연합뉴스

일각에서는 이번 선언을 두고 무역전쟁 여파로 WTO 체제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실익이 줄자 미국을 의식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국 상무부가 "향후 협상에서 새로운 특별대우는 추구하지 않겠다"라면서도 "특혜는 포기하되 지위는 유지한다"라고 밝힌 점이 주장에 힘을 싣는다.

이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내 신흥 개도국 연대를 유지하며 리더십을 과시하려는 행보로도 해석된다. 미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다자무역체제 수호를 명분으로 국제사회 내 입지를 넓히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 부회장은 "중국의 조치는 WTO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미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라고 평가했다.

중국 신화통신 등 현지 언론은 이를 "대국의 책임 있는 행동"으로 규정하며 국제 사회 단합을 촉구하는 조치라고 강조했다. 대외경제무역대학 법학원 교수이자 WTO 연구원인 지원화(纪文华) 교수는 "중국은 여전히 개도국이며 특별대우를 누릴 권리가 정당하지만 이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은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WTO 협정에는 △무역 기회 확대 △정책 공간 유지 △이행 기간 연장 △기술 지원 제공 △최빈국에 대한 유연성 부여 등 총 157개의 특별대우 조항이 마련돼 있다. 이 가운데 9개는 최빈국 전용이며 상당수는 비구속적 권고 조항이다. 다만 일부는 관세·비관세 장벽 감축, 서비스 개방 축소, 시행 유예 등 실질적 혜택을 담고 있다.

업계는 중국의 개도국 지위 포기가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본다. 중국은 이미 전기차, 배터리, AI, 로봇 등 주요 산업에서 상당한 기술력과 규모를 확보했으며 한국과 경쟁하는 배터리·전기전자 등 고부가가치 제품은 애초에 개도국 혜택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중국의 저가 중간재와 원자재에 의존해 온 기업들은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존에 비교적 낮은 가격에 들여오던 부품을 조달할 때 관세·규제 혜택이 줄어들면 더 높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국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경제적 의미보다는 정치적·상징적 행위로 봐야 한다"라며 "한국에 미치는 영향 역시 미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