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준 더봄] 미술관에서, 가을 진하게 타는 남자
[최익준의 낭만밖엔 난 몰라] 새 가을을 맞으러 국립현대미술관 나들이 이중섭의 '소'·오지호의 '남향집'을 만나다
저를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가을남(秋男) 입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만장일치로 지어준 별명이자 아호입니다. 재미없는 수업 시간엔 늘 꾸벅꾸벅~ 졸기를 밥 먹듯 즐겨한 녀석이었지요. 그러나 가을학기가 시작되면 눈망울 튀어나온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멜랑콜리 낙엽길을 밟으며 헤매고 다녔지요.
무색무취한 녀석이 가을이 시작되면 허파에 가을바람이 들어가 시를 읊어대고 연필로 노트에 그림을 그리다가 흥이 오르면 가방 속 보온병에 숨긴 소주 한 모금 마신 기운이 전신이 저릿해지면 유랑 시인 김삿갓 흉내를 내던 가을 소년.
살짝 얼큰하게 취한 김삿갓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의 한 구절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한 줄 남기고 떠나도 좋을 줄 알았던 가을 소년. 푸른 하늘을 가린 잿빛 구름을 좋아했지요.
수업을 마친 가을의 늦은 오후 햇빛 따사한 교실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읊었던 방랑자 김삿갓의 시 한 수가 교통 정지신호 앞에서 문득 떠오릅니다.
가을날 곱고 슬픈 노래가 새벽에 고요히 퍼지니
아름다운 안개가 홀연히 와 가까이 드리운다
기세 좋은 것이나 소박한 것 모두 다 그러하니
사랑은 슬프고 애잔하며, 아름다움이 하나인 듯
그런데 저는 가을을 따라 타지는 않습니다. 창문을 열어두고 잠에서 깨어날 무렵 새벽 공기가 섭씨 23도로 내려갈 때 내 몸의 감각 시계는 가을보다 먼저 깨어 가을을 기다립니다. 말하자면, 내가 가을을 타는 게 아니라 가을이 저를 따라 탑니다.
섭씨 23도 최적의 기온에 맞춰 엔도르핀이 나를 움직이면 차를 몰고 국립현대미술관 (MoMA)을 찾아가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미술관 가는 길 가을비 우산 속에서 본 거리는 무채색 구름 커튼이 하늘을 가렸지요. 갈 길 바삐 우산을 쓴 사람들 사이로 빗물에 산란한 붉은 신호등의 고독이 슬며시 찾아와 운전석 내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정지신호를 바라보다 문득 우리가 만났던 인연들이 떠오르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을 상상합니다. 우연히 길바닥 작은 웅덩이에 고인 빗물이 넘쳐서 강물로 흘러간, 정지신호 필요 없는 고속도로 같은 만남도 있고, 붉은 정지신호 앞을 서성이다 시나브로 멀어진 만남도 있지요.
인연이란 우연과 우연으로 이어지다 문득 대기 신호 앞에서 망설이다 멀어진 친구의 추억 아닐까요? 50억 년 은하계 별들의 먼지로 떠돌다 생명이 되어 잠시 한 세상 살다가는 인간에게 시간의 개념 차이일 뿐 우리는 언젠가 이별할 운명을 타고난 생물학적 실존이라며, 가을의 상념에 따뜻한 에스프레소 한 잔 타서 마십니다.
아차! 문득 뒤차가 녹색 신호등으로 바뀌니 길을 막지 말라며 ‘빵빵’ 클랙슨을 누릅니다. 초가을 잠시 운전석에서 30초 멍때리다가 퍼뜩 대도시의 생활인으로 돌아갑니다.
숲길 고적한 국립현대미술관(MoMA)으로 차를 몰아 윤형근 화가의 그림을 만났습니다. 클레오파트라도, 지난주 하늘로 떠난 원픽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도 “땅의 모든 생명은 나무와 비바람 앞에서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윤형근 화가의 비망록을 증빙할 뿐이겠지요.
흙을 밟은 모든 생명은 사라진다는 진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나의 올가을을 지배할 것 같은 예감입니다. 너도나도 세상의 잘난 군상들이 그리 대수롭지 않음을, 창작의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고 세상을 떠나간 화가들의 그림으로 읽으니, 위안이 되었습니다.
나의 가을맞이는 이중섭 화가의 붉고 힘찬 '소' 앞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찰칵' 소리에 가을 탄 내 마음이 '철렁' 합니다. 내 좁은 마음을 세게 비집고 들어온 최애 작품은 오지호 화가의 '남향집'입니다. 늦은 오후에 백구가 담벼락 아래 따뜻한 햇볕을 받아 졸고 있고, 내 고향집을 든든하게 지켜낸 기운을 주는 나무의 그림자는 푸른 꿈을 꾸는 듯합니다. 코발트 푸른색 인상파 그림자는 새로운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지요.
올가을, 나에게 위안을 준 그림을 찾아내 타고난 고독을 달래려 합니다.
여성경제신문 최익준 박사·산업정책연구원 교수/(주)라온비젼 경영회장
sebastiancho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