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철 더봄] 기련산맥(祁連山脈)과 하서주랑(河西走廊) (1)
[손흥철의 인문기행] 실크로드 그 신화의 길 (3) 아름다운 땅, 슬픈 역사
난주(蘭州)에서 돈황(敦煌)까지는 난신철로(蘭新鐵路, 난주~오로목제 烏魯木齊)의 일부분이며, 돈황선(敦煌線)의 일부로 거리는 약 1200km다.
서안에서 출발하는 난신철로는 지반이 고르지 않고 무른 지형적인 이유로 과거에는 보통열차(열차 번호 K·T, 시속 120km 정도)만 운행하다 최근에는 D열차(동차 動車, 시속 250km 이내. 연재글 4번, 열차 종류 참조)가 추가되어 두 종류가 여객 기차로 운행된다.
돈황까지 가는 길엔 북쪽으로는 동서로 1000km 너비 200~300km, 해발 4000m 이상의 기련산(祁連山)이 펼쳐져 있다.
기련(祁連)은 몽골어로 Altyn-Tagh이라고 부르는데 하늘(天)이라는 뜻이며, 기련산은 천산(天山)을 의미한다. 이 산은 티베트고원의 북쪽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에 걸쳐 있고 길이는 최대 2000km, 평균 해발고도는 4000m 정도이며, 최고봉인 단결봉(團結峰)은 해발 5827m이다.
북쪽 산맥 부분은 한여름에도 대부분 눈이 쌓여 있어 창밖으로 보는 경치가 그만이다. 이 산맥은 티베트고원과 중국내륙을 가르는 자연적 경계가 되며, 하서주랑(河西走廊)의 남쪽에 있어 남산이라고도 한다. 그 산록에 풍부한 물을 제공하여 목축과 농업이 발달하였다.
중국은 기련산 일대의 이 지역을 예로부터 흉노(匈奴)라고 불렀다. BC.4세기~AD.5세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목민 집단과 그들이 세운 제국을 의미한다. 흉(匈)은 Hun족, 노(奴)는 종이나 노예를 의미하며, 흉노는 훈민족을 비하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라 볼 수 있다.
흉노(匈奴), 선비(鮮卑), 유연(柔然), 돌궐(突厥), 거란, 위구르, 몽골(Mongolia) 등의 유목(遊牧)민족을 서융(西戎, 서쪽 호전적 전투 민족), 남만(南蠻, 남쪽 뱀을 숭상하는 민족), 북적(北狄, 북쪽 개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도 이들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치욕스러운 이름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에도 그대로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를 가리키는 아라사(俄羅斯)의 중국어 발음은 아라사(餓羅死, 굶어 죽은 사람)와 같다. 중국에서 좀 친했던 러시아 유학생은 이에 대한 불평을 여러 번 하였다.
한(漢)나라 이전 교류가 많지 않을 때 이곳은 중국의 황화유역 중원(中原) 땅과는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새외(塞外) 변새(邊塞) 지방이었다.
전한의 한무제(漢武帝, BC.156/BC.141~BC.87, 유철 劉徹)는 당시 18세에 불과한 곽거병(霍去病, BC.140~BC.117)과 그의 숙부 위청(衛靑, BC.?~BC.106)을 파견하여 여섯 차례나 흉노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들을 기련산 너머 고비사막 이북으로 축출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무위(武威)·장액(張掖)·주천(酒泉)·돈황(敦煌)을 중심으로 하서4군을 설치하였고 여기서 하서주랑(河西走廊) 혹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로써 한나라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훈족의 비극이다.
흉노를 정벌한 곽거병의 부조상(浮彫像)에는 “흉노를 아직 멸망시키지 않았는데, 어찌 가정을 생각하겠는가?(匈奴未灭,何以家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훈족은 처절한 슬픔과 마주하였다.
망아기련산(亡我祁連山) 기련산을 잃으니
사아육축불번식(使我六畜不蕃息) 우리 가축을 번식하지 못하고
실아언지산(失我焉支山) 언지산을 빼앗기니,
사아부녀무안색(使我婦女無顏色) 우리 여인들이 얼굴빛을 잃었도다
-사기 150권, <흉노열전> 제50, 사기색은 '흉노가'(史記 卷150, 「匈奴列傳」 第50, 史记索隐 <匈奴歌> )
이 짧은 한시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나 일일이 자세하게 번역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 의미만 보아도 전쟁의 패자가 겪어야 하는 비극적 삶이 실감난다. 언지산(焉支山)은 장액(張掖)의 칠채단하(七彩丹霞, 일명 무지개산)라는 산을 가리킨다. 예부터 여인들 화장에 쓰는 연지(胭脂)가 생산되는 곳이다. 여성들이 화장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흉노와 중원이 교류와 충돌을 반복하다 한무제(漢武帝) 사후 원제(元帝) 때는 흉노와의 화친을 위하여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BC.52~?)을 평화의 인질로 보내야 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왕소군의 고사에 대하여 백거이(白居易)의 왕소군이수(王昭君二首), 두보(杜甫)의 영회고적 명비촌(詠懷古蹟 明妃村) 5수, 왕안석(王安石)의 명비곡(明妃曲) 3수, 동방규의 소군원(昭君怨) 3수 등 많은 시인이 시를 남겼다.
오른쪽 창밖으로 보이는 만년설을 머금은 기련산은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 등 대막(大漠)과 연해 있다. 옛날 왕도려가 쓴 <청강만리(淸江萬里)>라는 무협지를 열독하였다. 타클라마칸과 기련산 그리고 북경의 권력자들과 어우러진 이야기에 가슴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지나가는 북쪽의 기련산과 남쪽에는 다양한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참으로 환상적 풍경이다.
다음 회에는 무위 장액 가욕관에 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하서회랑 대산맥과 사막이 어우러진 긴 계곡길이며,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크게 있는 곳에 도시가 생겼다. 그 대표적인 곳이 이태백의 월하독작에 나오는 주천(酒泉)이다.
여성경제신문 손흥철 전 안양대 교수·중국 태산학술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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