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티볼리, 신화와 분수 그리고 빨래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20) 예언가 시빌라의 동굴과 신전 고추장과 빨래의 여행 방정식
로마에서 티볼리로 향하는 길. 고대 황제와 신화의 무대가 펼쳐지리라 기대하며 달렸다. 주유도 할 겸 밖을 살피는데 차창 밖으로 먼저 스쳐 간 건··· 이탈리아판 ‘동네 빈민가’,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젖은 종이박스 더미, 기름이 번진 골목길, 피곤과 어둠을 마스크처럼 쓰고 있는 사람들, 어딘가 낯선 억양의 노동자 가족들. “어디서나 슬럼은 비슷하구나.” 미 선배는 두려운 표정으로 말하며 주유기를 집었다.
그때 주유소 맞은편에 ‘아시아 마켓’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단숨에 달려가 들어가자마자 고추장과 카레를 집어 들었다. 이게 바로 진짜 생존의 기술이다. 여행 가이드북은 이탈리아 교외 풍경을 소개하느라 수십 장을 할애하지만, 정작 여행자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여기서 고추장을 파나?” 하는 순간이다.
고추장과 카레를 집어 들고 나는 약간의 승리감을 맛봤다. “캠핑 여행의 진정한 승부처는 관광지가 아니라 저녁 밥상에 있는 거지.” 후니도 기뻐했다. 슬럼가의 아시아 마켓 쇼핑 덕에 우리의 캠핑 밥상은 한층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캠핑 여행의 본질이란 고생과 먹기 전쟁 아니던가.
기쁨의 순간이건만 미 선배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마도 “이 어두컴컴한 거리에서 너희는 쇼핑을 하고 싶니?”라는 무언의 항의였을까. 하지만 그걸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 여행에서 동행자의 심기를 일일이 캐묻다 보면 내 신경이 먼저 남아나지 않는다. 이럴 땐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다.
사실 여행이란 서로의 ‘개인 영역’을 끝없이 침범하는 예술이다. 같은 차로 움직이고, 같은 숙소에서 자고, 같은 풍경을 봐야 한다. 그러니 별것 아닌 일에도 때로는 갑갑하고 짜증이 소용돌이처럼 밀려온다. 나도 그렇고, 겉으론 태평한 척하지만 후니도 분명 그렇다.
그런 마음으로 도착한 티볼리의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 실망 그 자체였다. 도시 입구는 공장과 아파트가 섞인 베드타운에 가까웠다. “이게 고대 로마 귀족들이 사랑한 휴양지 맞아?” 하는 의문이 솟구쳤다. 마침내 빌라 데스테 정원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그랬다.
빌라 데스테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불평이 샴페인 거품처럼 사라졌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상상력과 사치스러움의 극치. 분수의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고, 그리스 신화 속 장면들이 정원 곳곳에서 현실처럼 살아나 있었다. “어서 와, 여기가 진짜 티볼리야.” 어떤 신화 속 정령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 듯했다. (물론, 혹시 진짜였다면 내 여행기는 공포 소설로 장르를 바꿔야 했을 것이다.)
분수 사이를 거닐다가 발견한 건 신화 속 예언자 시빌라의 동굴이다. 정확히 말하면 **‘Grotta delle Sibille’**라 불리는 작은 인공 동굴.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웅장한 신비보다 “부유한 귀족의 조경 센스”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상상해 본다. 카르타고의 멸망을 예언하고,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했다는 신비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정원 어딘가에 아직도 맴돌고 있다고. 옛날얘기와 신화를 좋아하는 내가 취향을 정확히 저격당한 순간이다.
정원을 빠져나오며 기념품 책방에서 영문 해설서를 집었다. 후니는 “책 안 볼 걸, 뭐 하러 사?”하고 빙긋 웃으며 놀렸다. 맞는 말이지만 “사진도 많고, 음… 치매 예방은 결국 공부라잖아.”라고 둘러댔다. 여행은 발로하는 게 절반, 머리로 하는 게 절반이라니까. (나머지 커다란 절반은 돈이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말자.)
다음 날은 시빌라의 신전을 찾아갔다. 무너져 가는 기둥들 사이에서 바람이 스친다. 사실 내 감각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누구라도 시빌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척해도 무방하다. 로마 시대, 신화적 관광지란 그런 상상의 자유를 주는 곳이니까.
이어지는 하이라이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빌라. AD 100년대, 그러니까 2000년 전에 지어진 휴양지다. 규모와 호화로움이 오늘날 리조트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더 압도적이다.
대욕장과 소욕장에서 이미 스파 문화를 즐겼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순간 ‘고대 로마인은 지금의 호텔 VIP 고객은 우스웠겠네.' 싶다. 부러움보다는 경이로움에 압도되는 순간이다.
인공 연못, 분수 회랑, 로마식 극장까지. 건축 방식은 또 어떻던가. 4각형 벌집 구조에 점토를 굳혀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리는 정교한 솜씨···. 고대인들이 이렇게까지 세련되고 호화롭게 살았다면, 정말 인류가 진보했는지 아닌지 헷갈린다. (적어도 내 캠핑 밥상과 비교하면 그들은 확실히 앞서 있다.)
저녁 무렵, 피곤한 몸을 이끌고 캠핑장을 찾았다가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예약 없이 일단 리셉션까지 들어가 보자는 요량이었는데 진입하자마자 자동차 통행로 철문 셔터가 내려진 것이다. 한순간에 우리는 무단 침입자가 되어 갇혔다.
글로 쓰면 영화 같지만, 당사자가 되어보면 알 수 있다. 전혀 낭만적이지도 재밌지도 않았다. 극도로 당황했고, 배는 고팠으며, 무엇보다 화장실이 급했다. 아니, 무슨 셔터가 대포처럼 툭하고 떨어지듯 내려오는 건지 자동차 위로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행히 캠핑장에 묵고 있던 한 커플이 쇼핑을 나서느라 셔터를 열어 대포 추를 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차박을 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숙소를 겨우 찾아 들어갔지만, 청소가 안 됐다며 주인은 한 시간이나 우리를 밖에 세워두었다. “뭐가 잘 안되는 날은 짜증 내면 안 돼요. 그냥 편하게 기다립시다.” 후니의 제안에 우리는 끝말잇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끝말잇기는 기다림이 얼마나 길어지는지를 체감하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다.)
기다림 끝에 들어간 숙소에서 우리는 질릴 만큼 고기를 많이 구워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결국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고기 때문이냐고? 우리가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기는 하지만 오늘의 포인트는 아파트의 세탁기 덕에 밀린 빨래를 전부 끝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빨래는 그 어떤 기념품보다 값진 성취감을 준다.
여행으로 취향이 달라지고 있는 걸까? 티볼리의 신화와 2000년 전 황제가 남긴 흔적도 모두 좋았지만, 결국 나를 황홀하게 만든 건 깨끗한 양말의 촉감이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