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미 더봄] 자식 키울 땐 안 그랬는데···단호함이 어려운 이유
[이수미의 할머니 육아] 머리론 알지만 마음이 안되는 일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손주를 키우는 일이 없어 유튜브나 책 같은 걸 찾아보며 이런저런 육아 공부를 한다. 친구들도 예전의 모임에서는 “손주 봐주지 말자!” “애 본 공은 없다”며 한껏 떠들더니 막상 내가 손주를 보기 시작하자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다. 몇몇이 손주를 보았지만, 어찌어찌 키우는지 나같이 전담으로 양육하는 경우는 드문 듯하다.
물론 손주야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지만, 내 자식의 자식이다 보니 ‘내 마음대로’ 키울 수는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제각각이고, 세대 차이도 있을 터이니 ‘이것이 맞는 건가···’ 싶을 때도 사실은 있다.
자식과 손주를 키우며 느낀 가장 다른 점은 ‘단호함의 기준.’ 딸 둘을 키울 때 호랑이 같은 엄마는 아니었어도 과자나 정크푸드를 쉽게 준 것 같지도 않고 숙제나 기상 시간 같은 약속 지키기도 나름 단호하게 훈육한 기억이 있다. 나 스스로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유하다는 평가는 평생 못 들어봤다.
그런데··· 손주는 그것이, 고백건대 안 되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결심해도,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무장 해제. 커가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꼭 그 시기에 배워야 할 것도 있다. 다 훈육이고 교육이지만 아이와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변화는 저항을 수반한다. 그 기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일관성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손주는 젖병을 늦게까지 떼지 못했다. 이가 나고 밥을 먹으면서도 잠이 오면 젖병을 찾았다.
“이제 더 이상 안 돼! 아기들이나 젖병 먹는 거야!”
무서운 얼굴도 잠시 해보지만, 오늘까지만 줘야지. 내일은 주지 말아야지···. 단호하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
말은 안 했어도, 딸과 사위도 내심 답답했을 게다. 덩치는 학교를 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아이가 젖병을 물고 있는 괴이한 풍경. 딸아이는 이 썩고 앞니 미워진다고, 몇 번 에둘러 얘기도 했건만 할머니의 우유부단함으로 아주 늦게 젖병을 놓았다.
말귀를 알아듣고도 남게 되었을 때, 손주 스스로 할미를 배려한 것이지 싶다. ‘이래서 할머니가 키운 애가 버릇이 없나 보다···’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모질게는 안 되었다.
또 한 가지는 미디어 시청. TV 없이 아이를 키우는 집도 있고, 겨우 앉는 애 앞에 핸드폰 영상을 켜주고 외식을 즐기는 부모도 있다. 종이책도 없어지는 세상이니, 미디어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지만 그 적절한 기준이 어렵다.
손주도 TV를 좋아한다. 뽀로로부터 좋아했다. 사실은, 화면에 시선을 뺏기는 잠시 동안 할미가 한숨 돌릴 수 있었고 같이 보면서 이런 것은 참 재밌고 좋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는 것. 남자아이가 게임에 빠지면 대학을 못 간다는 30여 년 전 괴담도 생각나지만 왠지 독서보다는 TV와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 또한 할미 책임 같다. 딸 둘을 키울 때는 서점이 가장 좋은 놀이터였는데···.
길을 걸으면서도 핸드폰에 눈을 박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간 정해 놓고 보기, 혼자 보지 않기, 핸드폰 영상은 금지 등등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두었으나, 걱정만 앞서고 뾰족한 대안을 모르겠다.
하긴··· 이 백발 할미도 유튜브라는 것에 재미가 들어, 핸드폰을 들고 사니 말이다.
여성경제신문 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leesoomi7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