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대미 관세 협상 시간 끌기 꼼수 쓰다 덤터기 쓸라

25% 관세 맞자 모순적 위상 착시 드러내 "가장 힘센 존재" 자임 뒤 조희대에 압박 트럼프 임기 버티기 작전···美 당국 포착

2025-09-16     이상헌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관계자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됐으니 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강원도를 찾아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꺼낸 발언이다. 그런데 나흘 뒤 조희대 대법원장을 겨냥해 “권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며 사실상 사퇴 압박을 가했다.

권력자가 스스로를 ‘힘센 존재’로 자임한 뒤 곧바로 ‘특별한 존재 착각을 경계하라’는 말을 내놓은 것은 자기모순의 극치다. 존재론적 자기부정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면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혼란만 남긴다. 이 대통령의 권한과 발언 사이에 괴리를 만들어내는 위상 착시(phase illusion) 증상은 한미 통상 협정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한미 관세협상과 관련해 “빠른 시일 안에 협상을 타결할 목표는 있다”면서도 “기업들이 큰 손해를 보는 합의는 대통령이 서명할 수 없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국익을 지키겠다는 논리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끌다 보복 관세의 위험을 키우는 신호로 비칠 수 있다.

16일 정치권 안팎에서는 ‘트럼프 임기 4년만 버티면 된다’는 대통령실의 기류가 공공연히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미국 국무부와 USTR(무역대표부) 측에 포착됐다는 점이다. 워싱턴 정가와 백악관 라인은 한국 정부가 ‘시간 끌기 전략’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트럼프 대통령이 보복 명분으로 삼으려 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대통령실 김유정 대변인은 “기업의 이익은 기업인의 판단”이라며 “미국에 가서 돈을 벌어야지 미국에 돈을 퍼주러 갈 순 없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당당한 원칙처럼 들리지만 이는 사실상 대통령이 민간 기업의 투자 결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식으로 포장된 발언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할 수 없다"는 서명에 기업 투자를 강제하는 권한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대차·삼성·LG·SK가 미국 각 주정부와 금융권을 상대로 체결한 것은 어디까지나 민간 투자 계약이다. 대통령은 이를 지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단지 동맹 간 약속을 존중하겠다는 정치·외교적 증표로 서명에 임할 뿐이다.

대미 투자를 외환보유액 유출과 연결시키는 김용범 정책실장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올해 상반기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380억 달러이고, 기업들이 발표한 대미 투자 3500억 달러는 5~10년에 걸쳐 나눠 집행되는 장기 프로젝트다. 단숨에 외환이 빠져나가는 구조가 아니며, 투자 재원 역시 외환보유액이 아니라 현지 법인 차입·미국 내 자본시장 조달·자체 현금 흐름을 통해 충당된다.

그럼에도 이재명 정부는 이 차이를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가 대통령의 서명 여부로 좌우되는 것처럼 왜곡해 마치 대통령이 ‘시간을 끌어 협상력을 높인다’는 인상을 심고 있다. 반미 감정을 자극해 국내 여론 결집엔 유리할지 모르나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동맹 약속 이행을 꺼린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투자와 관세를 ‘패키지’로 바라본다. 투자 약속이 성실히 이행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즉각 보복관세를 통해 압박을 가하는 것이 워싱턴의 일관된 패턴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선택한 시간끌기 전략은 협상 전술이 아니라 보복관세를 자초할 수 있는 도박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대통령실 안팎에서 흘러나온 “트럼프 임기 4년만 버티면 된다”는 언급은 국내 언론을 타고 미국,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된다. 이런 발언은 치명적이다. 트럼프는 이를 ‘한국이 동맹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고, 협상장은 즉각 보복관세라는 무기로 변한다.

칼날은 특정 업종을 넘어 한국 제조업 전반을 겨냥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의 시간끌기 전략을 확인한 순간, IRA 세제 혜택 철회, 무역법 301조 발동 카드가 추가적으로 꺼내질 수 있다. 반도체부터 자동차, 배터리, 철강까지 한국 수출의 핵심축을 정조준하는 것이며 단일 품목이 아닌 산업 전체를 압박하는 전면적 제재로 연결된다.

미국은 단순히 숫자의 크기를 보지 않는다. 신뢰와 약속 이행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한미 협상에서 대통령의 서명이 갖는 의미는 바로 그 신뢰를 증명하는 절차에 있다. 이를 시간끌기의 수단으로 오인하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과거 독일 사례에서 보듯 약속 불이행이 감지될 경우 정치적 압박이 극대화된다. 한국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의 서명은 결재 도장이 아니라 신뢰의 도장이다. 정작 관세 25%를 취소할 행정 서명권은 트럼프에게 있다. 플라자합의가 일본을 잃게 한 것이 환율 숫자가 아닌 신뢰 붕괴였던 것처럼, 한국 역시 ‘시간끌기’가 불러온 의심 한 줄기에서 무너질 수 있다. 스스로를 ‘가장 힘 센 존재’로 규정한 뒤 ‘특별한 존재 착각을 경계하라’는 모순처럼, 시간을 벌려다 되레 시간을 무기로 쥔 상대에게 목줄을 내어주는 꼴이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