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이 더봄] 휴대용 물컵에조차 담아내는 미감의 극치
[최진이의 아취 단상(雅趣 斷想)] 9월의 사물, 표주박 미감의 시작은 일상품에서부터
다른 건 몰라도 외출할 때 꼭 챙겨가는 물건이 있다. 바로 텀블러.
오래된 커피 중독자인 나와 남편은 아침마다 2개의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를 아침 식사할 때 한 잔 마시고, 출근할 때 텀블러에 넣어 오후까지 마신다. 일을 하지 않는 날에도 버릇처럼 텀블러에 커피를 넣어두고 외출할 때 가져가는데 아이들 텀블러에는 물을 넣어 함께 챙겨나간다.
밖에서 편하게 사 마실 수도 있지만 우리 입맛에 맞는 커피를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고, 물을 살 곳이 없어 갑갑한 상황에 아이들의 솟구치는 성화를 몇 번 경험하고 나면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해 조금 무겁고 불편하더라도 마음 편히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게 이제는 지극히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소싯적 학교 운동장에서 나오는 수돗물에 입을 대고 마시거나, 동네 뒷산에 올라 약수터에 놓인 (분명 여러 명이 썼을) 바가지를 대충 한 번 헹궈서 마셨던 일도 위생상의 문제로 요즘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물 좋고 산 좋았을 옛날에는 동네 우물에서 물을 퍼마시기도 하고 밥도 지었을 테고, 산길 지나다 샘물이 있으면 옆구리에 차고 있던 표주박에 가득 퍼서 마셨던 게 일상이었을 것이다. 뚜껑만 없지 표주박은 휴대용 물컵으로 지금의 텀블러처럼 널리 사용되었을 텐데 나는 그런 표주박을 내심 경시해 왔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내가 봤던 표주박은 둥근 박이나 길쭉하면서 중간에 잘록한 호리병박을 반으로 잘라 만든 모양이었고, 물을 뜨거나 곡식을 풀 때 쓰는 실용적인 바가지라고만 생각했을 뿐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는 사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전 파주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개방형 수장고에서 만난 표주박을 보았을 때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표주박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떠나보냈고, 동시에 여러 질문이 내 안에 떠올랐다.
이게 표주박이라고? 물 떠 마시는 그 표주박? 무슨 표주박이 이렇게까지 아름답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든 거야?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쓰지? 아니 이걸 어떻게 만든 거야 도대체?
내가 표주박 연구가가 아니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막연히 생각해 봐도 박물관에서 보았던 표주박을 일반인들이 쉽게 쓰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내놓으라 하는 집안에서 장인에게 부탁해 만든 물건일 것이다.
둥근 박을 용도에 맞게만 만들어도 표주박을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원재료를 보면서 어떤 모양으로 다듬고, 장석을 달아 허리춤에 매거나 벽에 달 수 있게 할 건지 고심하며 시간과 정성을 다해 만든 물건인 것이다.
찾아보니 딸을 시집보낼 때가 되면 애박(작은 박)을 심고, 박을 따서 반으로 쪼개어 예쁜 쇠고리를 달아 표주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표주박은 혼례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잔을 바꾸어 마시며 혼인 서약을 하고, 백년해로할 것을 다짐하는 합근례 때 사용했다. 혼례 후에는 두 표주박을 합쳐 신방의 천장에 매달아 애정을 보존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보니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던 질문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실제 사용을 염두에 두어 만들어졌겠지만, 아름다운 물건을 곁에 두고 보며 혼례식에서 다짐했던 그 마음을 떠올리며 일상을 잘살아 보라는 부적과도 같은 사물이 아니었을까. 비단 혼례식을 위한 표주박이 아니더라도 이런 아름다운 일상품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이의 손끝과 혀끝은 좀 더 부드러워지고 조심스러워졌으리라 추측해 본다.
2~3년에 한 번씩은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교체해서 사용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동안 쓰던 텀블러들도 꽤 오래 썼으니, 올가을에는 우리 가족의 더 아름다운 일상을 위해 그간 쓰던 것보다 더 예쁘고 멋진 텀블러를 구해봐야겠다. 이것은 일상을 더욱 아름답게 하려는 장인정신 조금에, 개인적인 구매욕을 많이 포함한 거겠지만.
여성경제신문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press.pressmomen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