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주 칼럼] 하얀 피부 vs 태닝 피부: 동서양 미의 기준 차이

[허영주의 크리에이터 세상] 아시아 문화권에서 흰 피부 선호 전통적인 계급 의식과 깊은 관련 미국에서는 태닝된 피부 선호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과 연관

2025-09-11     허영주 크리에이터
동서양의 상반된 미적 기준은 각 문화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문화권에서 흰 피부를 선호하는 것은 ‘전통적인 계급 의식’과 관련이 깊다. /게티이미지뱅크

매년 여름마다 소셜미디어에 뜨는 밈이 있다. 바로 ‘어떻게든 햇빛을 피하려는 아시아인 vs 어떻게든 태닝을 하려는 서양인’ 과 관련된 밈이다. 

영상 속엔 먼저 아시아인들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벌이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노력들이 유머러스하게 담겨있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 긴팔 옷과 모자로 온몸을 감싸는 모습, 심지어 큰 우산까지 들고 다니는 장면 등등. 

반면 서양인들은 살이 다 드러나는 비키니를 입고 햇빛을 즐기며 적극적으로 태닝을 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혹은 친구의 태닝된 피부를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부러워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필자는 미국에 이민오고 이 밈이 실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시아와 서양의 미적 기준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원래 아웃도어 활동을 좋아하는 필자는 등산이나 바다 수영을 하다보면 여름마다 자연스럽게 태닝된 피부를 갖게 되었다. 이런 필자를 보고 한국에 있을 땐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이렇게 까매지다니.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태닝이 된 것이 마치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필자의 피부색을 보며 “어떻게 이런 태닝 컬러를 만들었냐. 너무 예쁘다”며 부러워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필자의 남편 또한 처음 데이트를 할 때 필자의 피부색을 보고 너무 예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같은 피부색이지만 한국에서는 ‘문제’였고 미국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왜 이렇게 상반된 미적 기준을 갖게 된 것일까?

이러한 상반된 미적 기준은 각 문화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문화권에서 흰 피부를 선호하는 것은 ‘전통적인 계급 의식’과 관련이 깊다. 예로부터 까만 피부는 밭일이나 육체노동을 상징했고 하얀 피부는 실내에서 생활할 수 있는 양반이나 부유한 계층을 의미했다. 그래서 양반가 여성들은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장옷이나 가리개를 사용했고 농사일을 하는 서민과 구별되는 표식으로 희디흰 피부가 강조되었다. 이런 습관은 자연스레 ‘흰 피부 = 고운 얼굴’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만들었다.

반면 미국에서 태닝된 피부가 선호되는 이유는 현대적 라이프스타일과 연관된다. 태닝된 피부는 건강의 상징이자 동시에 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미국에서는 창백한(pale) 피부를 가리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실내에만 갇혀 지내는 마치 아픈 사람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태닝된 피부는 휴가를 갈 여유가 있고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건강하고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연상시킨다. 즉 태닝된 피부가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외모가 아니라 '휴가를 즐길 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건강한 신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두 문화권의 시선 차이는 결국 ‘무엇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한 상징의 차이로 귀결된다. 아시아에서 흰 피부가 곧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의미했다면 미국에서 태닝 피부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휴가를 떠날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다른 사회적 맥락 속에서 피부색은 같은 ‘특권의 상징’이지만 표현 방식은 정반대가 된 셈이다.

이 경험을 통해 필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미의 기준’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보면 오늘날 기준으로는 다소 풍만하다고 여겨질 몸매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었다. 당시에는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체형이 곧 건강과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으로 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종교적 영향 아래 여성의 미덕은 노출을 최소화한 옷차림과 창백한 피부였고 절제된 몸과 표정이 오히려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졌다. 

20세기 초반 헐리우드 여배우들이 세계적 아이콘이 되면서 날씬하고 세련된 몸매가 또 다른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21세기 들어서는 SNS와 인플루언서들이 만든 ‘슬림하면서도 탄탄한 몸매’ 가 새로운 기준처럼 소비되고 있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덧씌운 임의의 정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미의 기준이 단 하나 존재하는 것처럼 믿으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더 하얗지 못해서 누군가는 더 까맣지 못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얼굴형이나 체형이 유행에 맞지 않아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오늘의 ‘결점’이 내일의 ‘매력’으로 뒤바뀌는 일은 이미 역사가 수없이 증명해 왔다. 필자의 피부색이 한국에선 ‘문제’였지만 미국에선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처럼 결국 기준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건 남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남의 잣대에 맞추려는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피부가 희든 까맣든 태닝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정해진 답은 없다. 그러니 남들 잣대에 맞추기보다 내가 생각하는 ‘예쁨’을 따르자.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성경제신문 허영주 크리에이터 good7919@naver.com

허영주 크리에이터

성균관대학교에서 연기예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걸그룹 ‘더씨야’, ‘리얼걸프로젝트’와 배우 활동을 거쳐 현재는 팬덤 640만명을 보유한 글로벌 틱톡커 듀자매로 활동하고 있다. <2022콘텐츠가 전부다> 책을 썼다.
다재다능한 ‘슈퍼 멀티 포텐셜라이트’로서 여러 채널에서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를 설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한평생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어 열정적으로 살아보기’를 실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