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제 붕괴···마크롱의 중도주의가 부른 '이념 참사'

극단적 대치 속에 긴축 운운하다 철퇴맞아 합리적 온건주의 앞세우다 좌우 모두 불신 민주 앞세운 르펜·RN식 조기 총선도 한계

2025-09-09     이상헌 기자
유럽의회 선거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지난해 6월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르네상스당 당사에서 지지자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최후의 방어전이 무너졌다. 긴축재정안 부결과 내각 총사퇴는 정권 위기를 넘어 우아한 정치 권력을 지향하던 중도주의가 대통령제의 제도적 기반을 잠식한 비극으로 해석된다. 의회 권력으로 위협을 받아온 ‘프랑스 대통령제 붕괴’가 현실이 됐다는 평가다.

마크롱은 8일 엘리제궁에서 범여권 지도부와 온건 우파 공화당(LR)을 불러 연대를 호소했다. 그는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상대적 다수 블록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극우 국민연합(RN)의 ‘의회 해산 압박’ 앞에서 대통령제 권위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보장하지만 내각 불신임으로 행정부 전체가 붕괴하는 순간 대통령의 힘은 급속히 소진된다. RN의 바르델라 대표와 마린 르펜 원내대표는 의회 해산 후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새 총선으로 선출된 다수당이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르펜 진영은 이를 민주적 해결책으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대통령 권력의 기반을 해체하는 정치적 공세다.

지난해 조기 총선에서 이미 RN은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했다. 반RN 연합이 2차 투표에서 승리했으나, 지금은 좌파·중도 연대가 무너진 상태다. 이번 해산이 현실화될 경우 RN의 의회 장악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크롱이 의존하는 LR은 존재감이 크게 줄어 연합 효과가 미미하다.

프랑스의 경제적 현실은 정부 붕괴를 가속한다. 국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113%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긴축과 재정 팽창 사이의 선택지는 의회가 가져가므로 마크롱의 방어전은 이제 ‘시간 벌기’로 요약된다. 내각이 무너져 대통령만 빈껍데기로 남아 있는 체제는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르펜은 이 틈을 활용해 민주적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조기 총선을 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대통령직은 이미 권위가 사라진 상태란 얘기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제5공화국은 끝났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여소야대 하원의 불신임 가결은 프랑스를 다시 제3·4공화국 시절 정치적 혼돈으로 회귀시키고 있다. 당시 프랑스는 다당제 분열 속에 총리가 수개월 단위로 교체되는 불안정 구조에 시달렸다. 드골이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했던 이유가 바로 그 혼란을 끊기 위해서였다는 점에서, 지금의 사태는 역사적 퇴행처럼 보인다.

실제로 마크롱 집권 이후 불과 3년간 총리만 네 차례 교체됐다. 엘리자베트 보른, 가브리엘 아탈, 미셸 바르니에, 그리고 이번에 낙마한 프랑수아 바이루까지 줄줄이 단명했다. 이는 제5공화국 헌법이 약속했던 안정적 권력 구조가 이미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드골식 대통령제는 67년 만에 사실상 ‘운명을 다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대통령의 권위가 의회와 민심의 불신 속에 갉아먹히면서,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섞인 이중 구조는 더 이상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개헌 필요성이 강하게 거론된다. 대통령 임기를 축소하거나, 여소야대 국면에서 대통령을 조기 축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대로 대통령 권력을 더 축소해 사실상 의원내각제로 이행하자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된 제왕적 대통령제 붕괴를 촉발시킨 이번 사태는 유럽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정국은 마크롱 개인의 몰락을 넘어, 중도주의가 스스로 불러온 ‘대통령제의 종언’과 마주선 순간으로 해석된다. 정치권 관계자는 “마크롱의 가장 큰 실패는 좌우 모두의 불신을 자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