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팩] 美 3500억 달러 ‘백지수표’ 굳히기···정상회담 ‘합의문’ 없는 이유
韓美, 대미 투자펀드 투자 방식 ‘동상이몽’ 러트닉 “‘국가경제안보기금’ 조성에 활용” 투자 주도권 놓고도 계속 엇갈리는 입장 “명문화 없어 무역협상 교착 국면” 지적도
한미 정상회담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순항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실무진들은 죽을맛이다. 관세 협상의 핵심인 4500억 달러(약 487조원) 규모 대미 투자 펀드의 구체적 조성과 운영 방식을 놓고 미국과의 이견이 더 커지는 모양새여서다.
28일 여성경제신문이 깐깐한 팩트 탐구 코너를 통해 실무 협상 내용을 분석한 결과 ‘대미 투자에 실제 들어가는 돈은 5% 미만이고 대부분은 보증한도’라는 한국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미국은 ‘국가경제안보기금 조성에 활용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는 ‘백지수표’나 다름 없어 양국의 실무협상은 사실상 교착 국면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추가 청구서’는 막았지만 기존 청구서의 ‘악재화’는 막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국과 무역합의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정상회담에서 마무리 지었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틀 연속 강조한 것도 압박 수위를 높이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정상회담 하루 뒤인 26일(현지시각) 미 시엔비시(CNBC)와 인터뷰에서 “일본 자금, 한국 자금,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자금으로 국가 및 경제 안보 기금이 조성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며 “그들은 미국의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에게 자금을 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금이 기금 방식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다. 정상회담 후 한국 측 이 대통령이나 외교 실무진 중 대미 투자금 관련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았는데 미국 측에서 먼저 자국 기금 조성에 활용될 것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통상에 밝은 한 인사는 “미국이 사실상 백지수표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며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지시한 ‘미국형 국부펀드’를 한일 자금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일본 등 외국 정부의 대미 투자 자금을 활용해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복안이다. 러트닉 장관은 “이러한 것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이용해 성사시킨 거래”라고 강조했다.
이는 상호관세율을 15%로 낮추는 대신 미국에 3500억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의 무역협상을 타결했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명백하게 다르다.
당시 김용범 정책실장은 “1500억달러는 조선업, 나머지 2000억달러는 반도체·원자력·배터리·바이오·핵심광물 등 첨단·전략 산업 분야에 투자될 것”이라며 “현금 투자는 5% 미만이고 대부분 보증 한도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인데 아무 (용처도) 지정하지 않고 ‘돈을 대라’고 하면 거기다 돈을 댈 나라가 어딨느냐”라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협상 타결 후 “투자펀드는 미국 정부가 운용·집행하고, 구체적인 투자처는 대통령인 내가 정한다”고 말한 데 이어 러트닉 장관도 정상회담 후 미의 입맛에 따라 쓸 수 있는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힌 것은 사실상 한·일에 ‘백지수표’를 요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와 관련, 양국의 협상 내용의 명문화가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 찬반양론이 격화되고 있다. 먼저 ‘투자 주도권과 용처를 두고 양국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 것은 문서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구체적 합의가 쉽지 않은 문제를 미뤄놓고 문서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잠복해 있다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는 논리다.
다른 한편에선 명확하게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라면 문서화하는 게 좋지만 오히려 반대 경우도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예를 들어 2000억 달러 투자 펀드는 다분히 미국이 국내 정치용으로 과시하려는 것이기에 이를 곧이곧대로 명문화하면 한국에 큰 독이 된다는 이야기다.
한 외교 전문가는 “도널드 트럼프는 과도한 일방주의와 강압을 쓰고 있다. 관세 문제가 일단락돼도 환율을 걸고넘어지거나 수출 통제를 얘기할 수도 있다”며 “결국 우리 제조업 역량이 미국에 필요하다는 점을 어떻게 유효하게 잘 쓸 것인가가 관건이다”이라고 평가했다.
여성경제신문 유준상 기자 lostem_bass@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