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더봄] 오랜만에 시집을 펼쳤어요
[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시 한 편에서 비롯되는 생각들 다시 나를 반성하게 하네요
아이의 생일을 전후로 집 앞에 택배 박스가 쌓였다. SNS로 선물을 보내면 받는 이가 주소를 입력해 집으로 배달이 오는,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생일 축하를 하는 모양이다. 화장품부터 초콜릿, 인형··· 그 또래 아이들이 주고받을 만한 선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중 눈에 띄는 선물 하나가 있었다. 친구가 직접 전해주었다며 자랑하듯 보여준 문학과지성사의 시집이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시 몇 편에 특별히 포스트잇을 붙여 선물한 것이다.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고3인데 이렇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다니!
시집은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였는데, 아이가 책상에 두고 나가자마자 얼른 펼쳐봤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읽는 고3이라니, 예쁜 친구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 ‘청혼’의 전문이다. 시의 첫 줄이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됐으니 이 시들을 썼을 즈음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담겼을 거라 짐작한다. 청혼의 대상은 읽는 이에 따라 너일 수도, 세상일 수도, 현재일 수도, 미래일 수도, 혹은 시일 수도 있겠지만 슬픔과 절망의 긴 시간을 버텨낸 이후 그 무엇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또박또박 전하고 있다는 데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시를 읽고 나서 내가 했던 순결한 맹세에 대해, 나를 찾으려 했던 긴 술래의 시간 들에 대해, 내가 오랜 시간 사랑한 것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 시간 끝에 서서 다시 그것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그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용기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 것을 가졌다”고 말한 시집 속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에 자연스레 동의가 됐다.
이 시집 출간 이후 시인은 ‘나를 살린 문장’들을 쓴 작가들을 돌아보는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마음산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시인은 좋은 작가란 손쉬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가 아닌,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뼈아프게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분쟁을 버텨내고 나의 맹세들을 포기하지 않아야 너를 사랑할 수 있다!
여름의 더위가 가신다는 처서가 지나 가을이 문 앞에 왔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 한 권 집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안에 사랑은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지,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꼭꼭 씹어 들여다보면 좋을 때다. 딸 덕에 좋은 시 한 편을 마음에 담았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주 공공기관인, 전 매거진 편집장 hyunjoo7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