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移민국] (8) 중국엔 없는 중국요리 자장면과 닮은 정체성···화교, 한국 속 가장 오래된 이주민의 기록

한국도 대만도 아닌 '화교' 그 자체 협회 호적 관리로 이은 정체성 보존 韓서 자랐지만 복지 혜택 대상 제외 '제3의 문화' 존중과 수용으로 지켜야

2025-09-10     김성하 기자

2024년 기준 한국 체류외국인은 265만명, 전체 인구의 5.2%에 이른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며 다민족 사회이자 글로벌 이주국가를 향해 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단일민족 도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 시리즈는 전국 곳곳에 형성된 이민자 커뮤니티를 직접 방문해 체류 외국인의 생활 양식을 등을 기록하고 지역별 이주사회의 모습과 서사를 '이민자 지도'로 구축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에는 외국인 비자 제도 전반과 주요 체류 자격별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이민 정책의 큰 그림을 조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민정책 전반을 통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편집자주]

중국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메뉴 짜장면. 흔히 '중식'으로 분류되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춘장을 달게 볶아 감자, 양파,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이 한 그릇은 한국에서 재창조된 한식이다.  

그 뿌리를 따라가면 인천 차이나타운에 닿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청룡과 황룡이 얽힌 붉은 기둥 사이로 '중화가(中華街)'라고 새겨진 패루가 시선을 끈다. 그 너머로 늘어선 청사초롱과 원색 간판들은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 거리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흔히 짜장면 거리로 불리는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140년 넘게 화교 공동체가 한자리를 지켜온 삶터다. 골목마다 중화권 문화를 담은 식당과 상점, 협회와 학교가 어우러져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민자 거주지로서 단단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화교란 무엇일까. 대부분은 단순히 '중국인' 혹은 '대만인'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화교는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공동체다.

인천 차이나타운 거리 전경. /장세곤 기자

그들의 삶은 짜장면과 닮아 있다. 중국 음식으로 불리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새롭게 태어난 짜장면처럼 화교 역시 오래전 중국에서 건너와 이 땅에서 나고 자라며 대를 이어왔다. 대만 여권을 지녔지만 국적은 없고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왔지만 외국인 등록증을 들고 살아간다. 한국도, 대만도 아닌 '화교' 그 자체로 존재해 온 것이다.

인천 화교 사회의 시작은 1882년 청나라 인천 영사관 설치에서 비롯됐다. 이듬해 조선과 청의 조약으로 무역과 치외법권이 보장되면서 화교 상인 조계지가 들어섰고 그 아래로 학교와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들은 무역과 농업, 중식당 운영을 통해 자립적인 공동체를 일궜다.

결정적인 분기점은 1949년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자유 진영을 택한 이들은 대만 국적을 받아 이 땅에 정착했다. 이후 4세, 5세대까지 대를 이어 살아오며 공동체는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인천화교협회 내부 전경. /장세곤 기자

여성경제신문은 인천 화교 사회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듣고 있는 주희풍 인천화교협회 부회장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교 3세"라고 소개했다. 초·중·고교와 대학 모두 한국에서 다녔지만 행정상 신분은 여전히 '외국인'이다.

협회 건물은 세월을 품고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와 기록물, 오래된 의자 하나에도 공동체의 역사가 배어 있었다. 협회는 1887년 '중화회관'으로 출발해 지금까지 인천 화교를 대표해 왔다.

협회의 핵심 역할은 호적 관리다. 국적이 없는 화교에게 신분 증명은 곧 정체성이다. 협회는 자체 호적부를 만들어 출생·혼인·사망을 기록했고, 이 자료는 한국 정부에서도 공식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주 부회장은 "대만 정부조차 우리를 온전히 품지 않고 있기에 협회의 역할이 곧 교민 사회의 생명줄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주희풍 인천화교협회 부회장이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장세곤 기자

그는 자신과 같은 세대를 '구화교'라 불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들어온 '신화교'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현재 구화교는 국제결혼이나 귀화 등의 이유로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아이들의 정체성 계승은 새로운 과제가 됐다. 협회는 부지 일부를 무상으로 학교에 제공하고 장학금 제도를 마련해 후세대 교육을 돕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한국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늘면서 학생 수는 줄고 있다. 그는 "정체성을 이어갈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게 가장 안타깝다"라며 고개를 떨궜다.

인천과 서울에 남아 있는 화교 학교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협회는 아이들이 중국어와 중화 문화를 잊지 않도록 교육에 힘써왔고 대만 정부와 협력해 유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교섭을 이어왔다.

인천화교협회 옆에 위치하고 있는 중산화교학교 전경. /장세곤 기자

화교 사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복지 사각지대'다. 다문화 정책이 새로 유입된 이주민을 중심으로 설계되면서 정작 화교는 지원에서 비켜났다. 주 부회장은 "영주권을 갖고 있어도 혜택은 거의 없고 모든 걸 자치적으로 해결한다"라며 "대만도 한국도 어느 정부도 우리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화교가 한국 사회의 '오래된 이웃'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고 했다. 금 모으기 운동부터 항일운동, 2002년 월드컵까지 함께해 온 이들의 기여가 인정받길 바랐다.

주 부회장은 화교의 지난 세월을 발굴해 차곡차곡 정리해 왔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지만 '화교'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 역할을 자처해 왔다. 무엇이 가장 보람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람들은 화교 하면 짜장면만 떠올리지만 그 속엔 우리 선조들이 한국 사회에 기여해 온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라며 "그 역사를 바로 세우고 알리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전했다.

주 부회장은 인터뷰를 마친 뒤에도 차이나타운 골목길을 걸으며 교회와 절, 오래된 건물에 깃든 이야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풀어냈다. 지나가는 이들이 그에게 건네는 인사와 환한 표정 속에서 그가 이 공동체에서 어떤 존재인지 엿볼 수 있었다. 

화교협회는 인천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산, 대전, 광주 등 화교가 있는 곳마다 협회가 있다. 소규모 지역에서는 중식당이 협회 사무실을 대신하기도 한다.

한성화교협회 이중한 회장 취임식 사진. /한성화교협회

서울 명동 한복판에도 화교협회가 있다. 전국 대만계 교민단체를 대표하는 한성화교협회는 1884년 중화상회로 출발해 1969년 현재의 체계를 갖췄다. 이곳에서 만난 이중한 회장은 "존중이 곧 화교 사회의 생존 방식"이라며 열린 태도로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다.

한성화교협회는 유일하게 투표로 회장을 선출하는 독특한 운영 체계를 갖고 있다. 임기는 3년 단임제로 대만 국적자나 협회 호적에 등록된 교민만 후보 자격을 가진다. 이 회장은 제23대 회장으로서 협회를 이끌고 있다.

이곳에서도 '화교'라는 개념 인식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화교가 가진 역사와 특수성을 이해받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라고 했다.

그 여파는 아이들에게도 미쳤다. 최근 정치적 갈등과 일부 편향된 보도가 맞물리며 부산, 대구, 명동 등지의 화교학교까지 혐오의 화살이 향했다. 그는 "어른들의 갈등이 아이들에게까지 옮겨가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천 화교중산학교 내부 전경. /장세곤 기자

이 회장도 화교학교의 현실을 짚었다. 외국인학교로 분류돼 국가 지원이 없어 등록금과 급식비를 모두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그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며 "결국 무상교육이 보장되는 한국 학교를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화교 후세대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화교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세대를 잇는 문화와 정체성의 기반이다. 그러나 국가 지원이 없는 현실 속에서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화교 사회의 또 다른 과제는 귀화다. 협회는 이를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부정적 시선이 강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회장은 "귀화는 단지 여권 색깔의 차이일 뿐"이라며 "스스로 화교라는 정체성을 지닌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화교 여권만으로는 출국이나 취업에 제약이 따른다. 협회는 귀화를 선택한 이들이 보다 쉽게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화교를 위한 별도의 귀화 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재 화교의 귀화 요건은 일반 이주민과 다르지 않다. 일정 수준의 소득이나 6천만 원 이상의 자산이 필요하고 사회통합프로그램 종합 평가 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특히 고령 화교에게는 큰 장벽이다. 이 회장은 "시험이 어려워 귀화를 포기하는 어르신들이 많다"라며 "대대로 이 땅에서 태어나고 홈타운으로 살아왔지만 복지 혜택은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중한 한성화교협회 회장이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허아은 기자

이 회장은 화교로 살아가면서 실생활에서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존재한다고 했다. 영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세사업자나 소상공인, 기업인을 위한 금융·행정 지원에서 배제된다. 병역을 제외한 납세 의무를 모두 이행했음에도 외국인이라는 신분 탓에 사회복지와 안전망에서 소외되며 제도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그는 화교를 단순한 외국인이나 이주민이 아닌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까지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온 그 역사와 현실을 고려한 보다 합리적인 귀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교 사회가 바라는 것은 특별한 혜택이 아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격 즉 '제도적 인정'이다. 

한국 사회는 다문화를 외치지만 정작 가장 오래 곁에 있어 온 이주민을 위한 기본 제도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 국내 체류 외국인 270만 명 시대에도 화교는 '소수'라는 이유로 지원에서 배제돼 왔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혼란 속에서 이들이 가장 갈망해 온 것은 결국 '소속감'이었다. 협회는 그런 이들에게 행정 창구이자 공동체를 붙드는 마지막 울타리로 남아 있었다.

서학보 인천 인천차이나타운 화교상인협회장이자 한국인천화교소 중산중 고등학교 이사회 수석 부회장이 중산화교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허아은 기자

협회가 제도적 역할을 해왔다면 일상의 무대는 다시 인천 차이나타운 골목이다. 매일 뜨거운 불 앞에서 웍과 중식도를 쥐고 손님을 맞는 상인들이 있다. 행정 문서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며 한국 사회와의 공존을 이어온 이들이다.

20여 년 동안 이들을 위해 가장 앞자리에서 이 상권을 지켜온 인물이 있다. 인천차이나타운 화교상인협회장이자 중식당 '만다복'을 운영하는 서학보 회장이다. 그는 구도심을 차이나타운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구청과 3년간 무보수로 협력하며 운영 원칙을 세웠고 상인협회를 꾸려 목소리를 모아왔다.

코로나 초기. 반중 정서 확산으로 매출이 70~80% 급감해 상인들의 고심이 깊어지자 그는 거리마다 '대만 국기 달기' 운동을 펼쳤다. "이곳은 중국이 아닌 대만"이라는 메시지를 내세운 것이다. 그 결과 상권 이미지는 개선됐고 매출도 두 배 이상 회복됐다.

코로나 시절 서학보 회장의 아이디어로 인천차이나타운 거리에 대만 국기가 골목마다 걸려있다. /유튜브 캡처

서 회장은 자신이 이 거리에 바친 세월만큼 애정도 깊다고 했다. 그는 "저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며 "여기서 죽고 이 땅에 묻힐 것"이라고 말하며 이곳의 깃든 지난 세월을 담담히 전했다. 

코로나 이후 차이나타운은 예전만큼의 활기를 되찾지 못했다. 한국인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간판과 운영 방식이 현지화됐고 고유의 화교 분위기는 점차 희미해졌다. 

서 회장은 화교가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며 갈등 대신 수용을 택해왔다. 협회 운영 과정에서 한국인 상인과의 의견 대립을 마주할 때도 그는 이를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비유하며 차이나타운에서 화교가 이방인이자 난민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얘기했다. 

그는 "차이나타운이 먹자골목으로 남을지 정체성을 지닌 문화 공간으로 발전할지는 결국 수용과 존중에 달려있다"라며 미래에 대한 소신을 전했다. 차이나타운을 그저 관광지가 아닌 화교의 정체성과 혼을 담아낸 문화재적 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만다복이 위치한 골목길 전경. /장세곤 기자

서 회장은 "젊은 세대는 짜장면에 대한 향수도 미련도 없다"라며 "그저 옛 방식을 고집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먹거리가 다양하지 않던 한때는 충분히 상품성이 있는 메뉴였지만 햄버거와 피자에 익숙한 세대에게 짜장면 하나로 차이나타운을 유지하려는 발상은 더 이상 경쟁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변화에 뒤처진 사고방식이 결국 차이나타운 발전을 가로막는 한계"라고 꼬집었다.

일본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사례도 들었다. 상권이 늘자 현지인들의 마사지샵 입점 요구가 있었지만 상인들은 고유의 분위기를 해친다며 반대했고 덕분에 전통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는 "향후 10년 뒤 차이나타운의 모습은 정부와 시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짜장면이 한국에서 새롭게 태어나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듯 차이나타운 역시 그저 중국을 복제한 상업 거리가 아닌 한국과 어우러져 만들어진 '제3의 문화'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자 우리가 함께 써 내려갈 미래의 중요한 이정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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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