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치 선동에 이용되는 '웨스팅하우스' 음모론···K-원전 공든 탑 무너뜨릴라

APR 시리즈 美 System 80+ 파생 모델 체코·아프리카·남미 진출 합의문 보고도 안철수·한동훈계 극우 인사가 의혹 제기 이재명 정삼회담 닷새 앞두고 뇌관 부상

2025-08-20     이상헌 기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 원자력 산업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백악관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이 체코 원전 수주 과정에서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합의가 정치권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각에서는 계약 불평등을 문제 삼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기술 주권’ 담론이 자칫 트럼프 행정부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이다.

20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따르면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전일 “정상적으로 이뤄진 계약”이라며 논란을 진화했지만, 원전계 내부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음모론적 주장이 부각되며 사태는 예상보다 큰 파장을 낳고 있다.

K-원전 브랜드가 해외에서 계약 단위로 수출되는 것은 긍정적 성과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 불평등을 문제 삼는 ‘기술 주권’ 주장은 국제적 현실과 괴리가 크다. 한국의 주력 APR1400 원전은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의 System 80+를 토대로 개량한 파생 모델이기 때문에 독자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국내 정치용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

트럼프 행정부는 원전을 산업·안보 패키지로 다룬다. 지난 2022년 5월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합의했던 '한·미 원자력 고위급위원회(HLBC)'는 3년째 답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내 기술 독립 담론은 미국 입장에서 곧바로 동맹 균열로 해석되고 한국은 공동 수출 전선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글로벌 원자력 산업의 현실은 미국이 기술·금융을 주도하고 한국은 시공 능력으로 공급망을 뒷받침하는 구조다. 미국은 이 분업 체제를 통해 세계 원전 시장의 70%를 점령한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의 부상까지 막아내려 한다. 체코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북미·일본·유럽 시장을 차지하고 한국이 신흥 시장 진출에 나서기로 한 것도 이 전략의 일환이다.

다시 말해 합의는 불평등 조항이 아니라 한·미 원자력 공급망 재편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한국은 중동·동남아·아프리카 등에서 기회를 확보했고 러시아 로사톰과의 협력의 길이 열렸다. 이에 대응해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유럽 독점을 보장받은 것을 ‘기술 주권 침해’라고 규정하는 것은 국제 질서에 무지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웨스팅하우스는 APR1400이 자사가 2000년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을 인수하면서 지식재산 권리를 획득한 시스템 80과 시스템 80+의 설계를 토대로 개발됐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이는 다시 말해 한국이 원자로를 수출하는 모든 국가가 미국 집행 기관과 의회의 승인이 필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웨스팅하우스가 인수한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의 시스템 80+ 원자로(왼쪽)와 한국형 원자로 APR1400(오른쪽) 시스템도. / 해설=이상헌 기자

문제는 ‘기술 주권’ 음모론이 국내 정쟁을 넘어 국제 신뢰를 흔드는 변수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전기요금 인상 불가피론을 내세우다 낙마했던 이창양 전 산업부 장관 시절부터 이어진 원전 마피아의 정치적 선동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셈이다. 특히 25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둔 이재명 대통령 입장에서는 동맹 신뢰를 시험대에 올릴 수 있는 불필요한 잡음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수원-웨스팅하우스 합의문을 "원자력을 팔아먹는 계약"으로 규정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더불어민주당보다 이준석·안철수·한동훈계 인사가 많다. 원전 1기당 9000억 원을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하는 조건을 문제 삼은 정용훈 KAIST 원자력양자공학과 교수와 유재일 씨가 음모론을 부추기는 대표적 인물이다.

한수원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국제 원전 프로젝트에서 원천 기술 보유사와의 지분 배분은 불가피한 구조"라며  "필수적으로 지불해야 할 기술 사용료·안전 인증·설계 검증 비용을 합산하면 그 정도 수준이 나온다"고 말했다.

즉 '불평등 계약'이라기보다 법적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오히려 이를 제외한 90% 가까운 공사비와 부대 사업은 국내 기업 몫으로 돌아간다는 설명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K-원전은 원천 독자 기술이 아니라 미국 에너지부(DOE) 승인 없이는 단독 수출이 불가능한 시물라크르라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재명 정부가 정상회담에 앞서 국내에서 논란을 바로잡지 못하면 미국의 공급망 전략에서 배제되는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