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쌀·소고기 지켰다는 거짓말"···4월에 격노한 트럼프, 8월엔 왜 달라졌겠나

허수아비 얼굴 마담만 만난 관료들 기업투자 대부분 4월 결정된 내용 농산물 예외 조항 법적 유예력 상실 이젠 불확실성 운운하며 시간 끌기

2025-08-08     이상헌 기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스캇 베선트 재무장관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허수아비 라인과 통상 협상을 이어오다 판 전체를 갈아엎는 역풍을 맞았다. 4월 초 백악관 내부 보고 뒤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하며 협상 라인을 직속으로 전면 교체했지만 한국 정부는 이 메시지를 끝내 읽어내지 못한 채 외교적 착오를 거듭했다는 분석이다. 가장 아픈 대목은 한미 FTA란 방어막이 사라진 상황에서의 무차별 관세 보복에 노출된 상황이다.

7일 여성경제신문이 확보한 정부 최고위급 소식통에 따르면, 4월 3일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및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사실상 합의 형식으로 협의를 진행했고 이를 언론에 성과처럼 흘렸다. 이에 격노한 트럼프는 “내가 승인한 적 없다”는 강경한 반응을 남긴 채 협상 라인을 바로 갈아엎었다.

이후 트럼프는 러트닉과 그리어를 명목상 협상 라인에 잔류시킨 채 실질적인 권한 행사는 금융권 출신 재무장관 ‘스콧 베선트’를 통해 진행했다. 트럼프가 베선트를 옆에 두고 새로운 통상 구조를 설계하도록 지시한 순간이 한미 FTA 체계 내에서 이뤄지던 양국 간 협의 구조를 무력화한 것이다.

판 갈이가 끝난 상황에서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은 4월 8일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와 면담했다. 그러나 이 시점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통상 라인을 재정비한 직후였다. 트럼프의 직접적인 승인 없는 협상은 무효이며 FTA 체결 국가 간 합의가 아닌 대통령 직속 구조로의 일방적 재편을 의미했다.

5월 16일 제주도에서 안덕근 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가 만나 통상 장관급 회의를 열었으나 실권은 이미 이동한 뒤였다. 트럼프는 러트닉과 그리어 라인을 신뢰하지 않았고 이 회동 역시 실질적 합의보다는 의례적 반복에 가까웠다는 분석이다. 한국 정부는 이 회의를 통해 진전이 있었다고 발표했지만 미국 측 의사결정 체계에서는 사실상 무시됐다.

이후 6월 24일부터 7월 중순까지 여한구 본부장은 러트닉·그리어를 수차례 면담하며 상호관세·품목 면제를 요청했지만 어떤 실질적 응답도 받지 못했다. 이 시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7월 8일 한국에 직접 서한을 보내 “8월 1일부터 상호관세 25%를 부과하겠다”고 명시한 시점과 겹친다. 국내에선 정권이 교체되고 외교는 지속됐지만 윤석열-이재명 정부는 허수아비만 상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과 여한구 본부장이 7월 24일 러트닉 장관과 협상에 나서고 이어 27일에는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 재차 협상을 시도했지만 한국은 미국 측 실권자가 이미 바뀐 상태인지도 몰랐다. 정부는 이를 협상이라 믿었으나, 트럼프의 결정은 이미 다른 채널에서 마무리됐고 한국은 더 이상 협상 상대로 간주되지 않고 있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9일(현지시간) 미국측 얼굴마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얼핏 보면 구윤철 경제부총리와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관세를 15% 수준으로 낮추며 일본 수준의 조율을 이뤄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국내 언론 보도는 이를 외교적 성과로 포장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 측이 무엇을 얻어냈는지에 대한 분석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 이번 협상은 수치 조정이나 절충안이 아니라 한미 FTA라는 조약 수준의 합의를 사실상 폐기시키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이뤄냈다. 여기에 쌀시장 개방 이슈가 명확히 포함됐다는 점에서 농산물 방어선을 마지막으로 침투당한 셈이다.

미국 측은 그동안 모든 통상 협상에서 ‘한미 FTA 존중’을 전제로 움직여 왔으나, 8월 타결 이후에는 명분조차 유지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자랑하는 일본과 동일한 15% 수준의 관세로 타결은 실질적으로 한미 FTA의 ‘동등한 당사자’ 원칙이 종료됐다는 뜻이다. 이 결과, 기업의 투자 수익 중 90%가 미국으로 회수되는 구조가 만들어졌으며, 이는 명백히 상호주의 원칙이 아닌 단방향 흡수 구조로 작동하게 된다.

특히 이번 협상에서 언급된 기업 투자 확대나 산업협력 약속은 4월 안덕근 장관 협상 시점부터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사항들이다.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새로 얻어낸 것은 없으며, 오히려 미국은 같은 내용에 정치적 승인 효과만 더해 다시 가져간 셈이다. 이 지점까지는 이재명 정부도 어느 정도 드러낸 현실이다.

진짜 치명적인 손실은 이면에 있었다. 한국이 그간 FTA를 방패 삼아 쌀 개방을 거부해 왔던 전략적 포지션마저 이번 협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이다. FTA라는 법적 구속력을 명분 삼아 농산물 개방을 유예하고 있었던 최소한의 방어선이 이번 타결로 붕괴됐으며, 8월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정상 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쌀과 소고기를 개방하지 않으면 어떤 관세 보복이 취해질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쌀과 소고기는 이제 더 이상 예외 조항이 아닌 미국의 통상 압박 리스트에 정식으로 포함된 항목으로 재분류됐다. 한국은 이 사안을 더 이상 유예하거나 방어할 수 있는 제도적 여지도, 외교적 시간도 사실상 모두 잃었다. 이는 정부가 마땅히 인정하고 국민에게 명확히 설명해야 할 내용이지만 김정관 산업부 장관 등 핵심 당국자들은 “초불확실성이 남아 있다”는 모호한 표현 뒤에 숨어 ‘벼랑 끝 시간 끌기 작전’에 들어갔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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