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미 더봄] 백발에 관한 단상
[이수미의 할머니 육아] 할머니도 되었으니 백발을 해볼까 '그냥 놔두었더니···' 백발이 되었다
딸의 결혼 후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임신 소식을 들었다. 각자의 일로 너무나 바쁜 딸 부부인지라 애를 언제쯤 낳을 거냐고 물어본 기억은 없다. 예전과 달리 자식들의 결혼도 저희가 알아서 결정하고, 출산도 다 자유 의지이니 해라, 말아라, 낳아라, 언제 낳느냐 그러는 부모는 드물어졌다.
낳으면 키워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아기가 생겼다는 말에 왠지 놀랐다. 95%쯤은 너무나 기뻤고, 아주 약간 순간적으로 걱정도 스쳤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함께 엄마의 길로 들어선 딸의 고단함이 예견되었다. 일하는 엄마였던 “동병상련”이랄까. 마음의 준비 말고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제일 처음 한 일은 “급 여행”. 부랴부랴 예매를 해서 동생과 장가계를 다녀왔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은 양 허겁지겁 뭘 할지 마음이 바빴다.
두 번째는 “노안 수술”. 마흔쯤부터 돋보기를 써야 할 정도로 노안이 심해서, 이 상태로 아이 분유라도 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기계(?)를 고쳐 쓰기로 마음먹었다. 사용 설명서 같이 작은 글씨는 돋보기를 쓰고도 읽기 힘들었다. 눈이 안 보여 약이라도 잘못 먹이면 큰일이지 싶었다.
눈 수술은 공포스러웠다. 하루살이만 날아와도 본능적으로 감게 되는 눈을 수술한다니 상상만으로 벌써 초주검이 된 기분. 수술 후 일주일쯤 썼던 안대를 풀고 나니 갑자기 무대 조명이라도 켜진 듯 세상이 밝아져서 눈이 부셨던 기억이 난다. ‘심 봉사가 눈을 뜬’ 셈이다.
세 번째 한 일은 "염색 중단". 가장 큰 이벤트. 부모님 두 분이 마흔쯤 다 백발일 정도로 강한 유전자 덕에 염색은 일상이었다. 3주에 한 번쯤 염색했던 것 같다. ‘백발로 다녀볼까···’ 몇 년을 고민만 하고 결단을 못 내렸다. 생각보다 쉬운 결심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어차피 할머니. 흰머리로 살아보자! 검은색 머리칼을 잘라내며 얼추 백발이 될 때까지 1년은 걸린 것 같다. 반반쯤이었을 때는 아주 많은 이의 눈길을 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난다. 젊은이들 말고는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는 이가 없었다.
남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반흑반백)은 내가 보아도 아주 가관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렇게 얼룩 강아지같이 되기까지도 쉽지 않았기에 눈 딱 감고 버텼다. 금발도 금색만이 아니라는데, 백발도 흰색만은 아니다. 흰색, 검은색, 회색, 갈색··· 오묘하게 섞여 있다. 거의 백발이 되자 ‘왜 진작 안 했을까’ 싶을 만큼 편하고 자연스럽다.
어쩔 수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늙어 보일까 봐 울며 겨자 먹기로 염색을 반복하는 '준 할머니들'이 내 머리카락을 부러워한다. 심지어 쫓아와 만져보는 강심장들도 있다. 어떻게 한 거냐는 질문도 수없이 받았다. 딱히 해줄 말은 없다.
“그냥··· 놔둔 거예요.”
여성경제신문 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leesoomi7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