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더봄] 손주가 자주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김정관의 단독주택 인문학] 이 시대의 단독주택을 한옥에 오버랩해 보니 사랑채를 들이면 손주와 자주 만날 수 있어   채 나눔으로 구분하는 거실, 주인, 손님 영역

2025-08-02     김정관 건축사·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

 단독주택을 설계하다 보면 부부가 집에 관한 생각이 달라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우며 대립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부부 중 한 사람이 집 짓기를 주도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설계 작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게 된다. 집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한 사람은 모양새가 예쁜 집, 다른 한 사람은 쓰임새가 좋은 집을 주장하게 되면 합의점을 찾는 건 요원하다.     

사실 단독주택은 부부 두 사람만 산다고 해서 그들만 만족하면 될 일이 아니다. 집이 지어지고 나면 허물어질 때까지 누가 살아도 좋은 집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집에 관한 인문학적 접근이라야 하는데 키워드는 의외로 손주가 된다. 손주를 데리고 자식들이 찾아와서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집, 결국은 손님까지도 우리집을 쓰는 사람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집을 쓰는 사람의 범위를 넓히면 건축사의 집에 대한 넓고 깊은 식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 시대의 단독주택을 옛집인 한옥에 오버랩해 보니   

한옥에서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으로 한 달 정도 생활을 해보면 외국 사람은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이나 우리나라 사람이나 입식 생활로 사는데 왜 한옥 생활에 적응하는 게 다를까? 어차피 한옥에서 살아보지 않은 건 외국인과 우리가 다를 게 없는데.     

우리는 며칠이면 옛집인 한옥에 적응해서 그 집에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지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외국인은 불편하고 어색한 생활을 견디며 체험 기간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지 않을까 싶다. 왜 우리는 금방 익숙해지고 외국인들은 그렇지 않은지 원인을 생각해 보면 유전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몸에 들어있는 조상님들께 물려받은 유전자가 마치 그렇게 살았던 주거 습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배치 및 평면도, 단아한 한옥인 관가정에서 나의 단독주택 설계 작업의 바탕을 삼게 되었다. /김정관
관가정 안채의 안마당과 대청, 이 영역은 사랑채와 완전하게 구분되어 집안 식구들의 일상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 /사진=서경원
관가정 사랑채, 바깥주인의 영역으로 손님들이 수시로 드나들지만, 안채와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집안 식구들과 마주칠 염려가 없다. /김정관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유하고 있는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익숙한 듯 보이는 행동을 하고 있다. 입식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겨울에는 거실에서 소파를 두고 전기매트에 앉고 누워 방바닥의 따끈한 온기가 몸에 닿는 걸 즐기고 있다. 평소에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만 거하게 별식을 먹을 때는 거실에 상을 차려서 바닥에 앉아 먹는 걸 좋아한다. 나이가 들면 푹신한 침대보다 난방이 들어 있는 흙침대나 돌침대를 선호한다.     

아파트는 공급되는 그대로 살아야 하지만 단독주택을 지어서 산다면 한옥에서 가져올 게 많을 것이다. 우리 유전자에는 한옥에서 살았던 기억이 담겨 있으므로 식구들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식구들 개개인이 주장하는 집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집은 한옥과 닮은 집이라고 보면 어떨까? 그렇다고 해서 목조기와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는 건 당연하다.     

우리집에 사랑채를 들이면 손주와 지낼 수 있는데     

한옥에는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이 나누어져 바깥주인과 안주인의 일상이 서로 존중되었다. 바깥주인인 남편은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손님과 생활했다. 안주인은 안채에서 식구들과 지내며 집안 대소사를 주관했다. 한옥은 손님이 끊이지 않아야 반가(班家)로서 명망을 가질 수 있었으니 사랑채의 역할이 곧 가문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한옥은 사랑채에 손님이 아무리 많이 드나들어도 안채의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랑채는 사랑 마당으로 손님이 드나들고, 안채는 중문을 통해야 안마당으로 들 수 있어서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사랑채는 항시 손님이 끊이지 않지만 안채는 일상생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손님과 식구들이 한집에서 서로 불편하지 않으니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 분리는 집의 규모와 상관없는 한옥의 기본 얼개가 된다. 

건축사로서 첫 단독주택 작업이었던 부산 해운대 관해헌, 거실과 침실채를 채 나눔 개념으로 설계했다. 평소 손님과 주석(酒席)이 잦았던 건축주는 관해헌을 짓고 나서 집에서 손님을 자주 맞아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정관

아파트는 사랑채 없이 안채만 가진 집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러다 보니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우리는 손님을 맞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로 부모가 자식 집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손주도 할아버지 할머니 댁을 자주 찾지 못하는 불행한 가족생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위와 며느리가 가족의 일원이 되려면 자주 보며 지내야 하는데 아파트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단독주택을 지어 산다고 하면 아파트에는 없는 사랑채를 넣어 설계해야 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손님 중의 손님인 손주가 자주 올 수 있는 집이라는 개념을 설계의 주안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풀어서 얘기하면 사위와 며느리가 와서 하룻밤 편히 묵을 수 있는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일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자주 와야만 삼대가 어우러지는 가족이 된다.   

 채 나눔으로 구분하는 거실 영역, 주인 영역, 손님 영역     

이 시대 주택에서 사랑채 영역은 거실로 설정할 수 있다. 집의 얼개를 잡으면서 거실채를 공적 영역으로, 침실채는 사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또 침실채를 부부 영역과 손님 영역으로 나누면 집의 쓰임새가 명확해진다. 여기서 손님 영역은 아이들이 독립하기 전에는 그들의 방이 된다.    

이렇게 집을 쓰는 영역이 분명하게 나누어지면 식구들의 사생활이 확실하게 보장된다. 아파트에서 안방 이외에 다른 방의 정체성이 문간방에 그치고 있어서 식구들이 집에 대한 소속감이 떨어진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면 집을 떠나고 그 이후에는 우리집에 대한 소속감 없이 따로 사는 듯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소재 단독주택 심한재 조감도, 사랑채는 거실채, 안채는 침실채로 채 나눔으로 설계했다. 침실채는 아래층이 부부 침실이고 위층이 아이들 방인데 나중에는 손님방이 될 것이다. 손주가 자주 올 수 있도록 설계된 한옥에서 가져온 개념을 적용한 단독주택이다. /김정관
심한재 전경. 거실채와 침실채를 분리하고 침실채는 주인 침실과 손님 침실을 층으로 나누어 손님이 편히 머물 수 있다. 사위와 며느리가 기꺼이 오려고 하니 손주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집이다. /김정관

아이들이 가정을 가지면서 사위와 며느리라는 자식이 생기고 곧 손주라는 보물을 얻게 된다. 보물 같은 자식인 손주와 자주 만나서 조손(祖孫)의 정을 나누려면 사위와 며느리가 자주 찾아주어야 한다. 그러니 아파트에서는 힘든 일이라 손님을 배려한 단독주택의 얼개를 담아 설계하면 가능해진다. 사랑채 개념을 적용하여 채 나눔을 통해 손님이 편히 머물 수 있게 하니 손주와 지내는 시간을 자주 가지게 되었다.    

침실과 떨어져 있는 거실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음량을 높여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악기를 연주해도 침실에 있는 다른 식구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또 손님-사위나 며느리가 머무는 침실 영역이 주인-부모 침실 영역과 떨어져 있으면 며칠을 머물러도 불편하지 않다. 사위와 며느리, 그밖에 손님이라고 해도 우리집에 머무는 게 내 집처럼 편할 테니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다.          

 


한옥의 사랑채 개념을 우리집에 적용하게 되면 손님 중의 손님인 손주가 며칠이라도 묵어갈 수 있다. 단독주택을 지어서 사는 이유 중에 이보다 더 중요하고 노후의 즐거움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게 또 있을까 싶다. 주거 생활에서 어른들은 상수(常數)라면 아이들-손주는 변수(變數)라고 할 수 있다. 단독주택에서 살게 되는 나이는 손주를 보게 되는데 일상의 변화는 얼마나 자주 함께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손시시방래, 불역락호(有孫時時方來, 不亦樂乎)’- 손주가 자주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로 바꾸면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손님을 배려한 설계는 결국 손주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니 단독주택 설계의 방향을 더 나은 삶을 담는 우리집을 짓는 인문학적 접근이 아닐까 싶다. 

여성경제신문 김정관 건축사·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 kahn7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