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移민국] (6) '조선족 타운' 대림동···민족 정체성을 회복하는 공간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아온 이들 언어·문화 장벽에 선 다문화 학생 예산 부족이 드러낸 제도적 한계 이민 아닌 귀환, 이웃이자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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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기준 한국 체류외국인은 265만명, 전체 인구의 5.2%에 이른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며 다민족 사회이자 글로벌 이주국가를 향해 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단일민족 도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 시리즈는 전국 곳곳에 형성된 이민자 커뮤니티를 직접 방문해 체류 외국인의 생활 양식을 등을 기록하고 지역별 이주사회의 모습과 서사를 '이민자 지도'로 구축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에는 외국인 비자 제도 전반과 주요 체류 자격별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이민 정책의 큰 그림을 조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민정책 전반을 통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편집자주] |
"안녕 아가씨 와서 구경 좀 하고 가요(你好,小姐姐 来看一下)"
서울 영등포구 대림 중앙시장.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중국어가 들려온다. 지나가는 행인 중 중국인이 더 많은 이곳에선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더 자연스럽다.
거리를 따라 늘어선 붉고 화려한 중국어 간판 아래 작은 글씨로 한국어 번역이 붙어 있다. 서울 중심부이지만 마치 중국 거리를 옮겨 놓은 듯한 '리틀 차이나'가 형성돼 있다. 한 상인에게 다가가 한국어로 가격을 묻자 "한 봉지에 3000원, 맛있어요"라며 자연스럽게 언어를 바꾼다.
양꼬치와 마라탕 같은 익숙한 음식부터 오리 머리, 양 잡탕처럼 생소한 요리까지 시장을 가득 채운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왜 이곳 대림동일까.
배경은 1992년 한중 수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소련 해체로 냉전 구도가 급속히 무너지며 미·중 관계가 점차 안정됐고 한국도 외교 다변화를 본격 추진했다. 같은 시기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코리안 드림'을 꿈꾼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초기엔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가리봉동 일대에 모여 살았지만 지리적 이점과 교통 편의성을 갖춘 영등포구 대림동으로 중심지가 옮겨졌다. 이후 서울 최대 중국계 이주민 밀집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대림동은 2호선과 7호선이 교차하고 수원·인천 등 공단 지역으로의 출퇴근이 용이했다. 거리에는 환전소, 행정사 사무소, 중국 식당과 슈퍼마켓이 들어섰다. 조선족들의 정착은 곧 대림동 일대를 그들만의 문화로 채워나갔고 교통·주거·일자리 삼박자가 갖춰진 매력적인 생활 터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비교적 빠른 시기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제도적 요인이 컸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자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족관계 서류와 범죄 이력 검증, 언어 능력 등을 갖추면 재외 동포 비자(F-4) 발급이 가능했고 내국인에 준하는 취업과 창업 활동이 허용됐다. 제한 업종에만 일할 수 있는 일반 외국인 취업비자(H-2)와 달리 안정적인 정착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그로부터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한중 수교 30주년이었던 2022년 기준 국내 중국 동포(조선족)는 약 52만 명에 달했다. 2004년 고용허가제와 2007년 방문취업제도 등 정책적 변화도 이 같은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한족 이주민도 점차 늘고 있다. 주된 이유는 더 나은 생활 환경과 자녀 교육 여건을 찾기 위해서다.
이민은 단지 한 개인의 이동이 아니다. 가족이 함께 오거나 새 가정을 꾸리며 정착해 간다. 대림동에 흔히 보이는 양꼬치 가게 사장, 휴대폰 개통을 도와주는 대리점 직원, 비자와 행정을 책임지는 여행사 사장 등. 이들이 일터를 꾸려가는 동안 그 자녀들도 대림동에서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다문화 학생이란 이름 아래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여성경제신문은 대림동 중심에 위치한 서울 대동초등학교를 찾았다. 이곳에서 이주민 자녀들이 어떻게 교육받고 성장하는지 그들이 마주한 낯선 환경에서의 혼란과 어려움마저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서울 대동초는 전체 학생의 약 80%가 이주 배경을 지닌 대표적인 다문화 공립학교다. 그중 대부분이 중국계 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수성을 가진 이곳에서 4년째 교장을 맡고 있는 김선희 교장은 다문화 교육을 앞장서 이끌어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학교는 다문화 교육 연구학교로 지정돼 선도적인 도전을 이어왔다. 다문화 특별학급 운영, 이중언어 강사 배치 등의 경험은 자료화·매뉴얼화되어 앞으로의 다문화 학생을 접하게 될 학교에 기준점이 될 예정이다.
매일 평일 오전 8시. 이른 아침부터 대동초의 운동장은 공을 차며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북적거린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오고 싶은 학교'를 만들자던 김 교장의 바람은 '모두 모아 축구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현실이 됐다.
한국 학생과 중국계 학생이 뒤섞인 풍경. 언어는 달라도 공 하나면 금세 친구가 된다.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이면 자연스레 벽이 허물어지고 우정이 싹튼다. 김 교장은 "스포츠라는 공통 언어가 학생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라며 현장의 보람을 전했다.
학교 안 복도를 걷다 보면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카메라를 든 취재진을 향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인사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해맑고 순수하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김 교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학생과 학부모가 겪는 어려움을 설명했다. "최근 입학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한국어를 거의 못 한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라며 "입학 상담부터 서로 소통이 어려워서 애를 먹을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가정통신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담임교사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일부 학부모는 '대동초에선 중국어로 수업한다'는 오해를 갖고 오기도 한다. 김 교장은 "학교의 차별화된 다문화 프로그램이 중국 부모님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생긴 오해 같다"라며 "학교 수업은 한국어로 진행되며 이중언어 강사가 다문화 특별학급을 통해 수업을 지원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김 교장은 낯선 언어와 환경 속에서 수업을 따라가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에 대해 진심 어린 공감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학생이 한글로 된 교과서를 들고 한국어로 수업하는 선생님께 교육과정을 배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한번 상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환경도 녹록지 않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일용직이나 장시간 노동 등 3D 업종에 종사해 자녀를 돌볼 여력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일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사랑과 보살핌이 절실한 시기에 돌봄의 공백은 마음의 상처로 이어지고 있다.
우울감을 겪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김 교장은 늦은 시간 자해 행동으로 인해 연락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강하다. 그는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학생들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학부모님들은 상담 자체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학교는 위클래스 상담실과 교육복지실을 통해 다양한 심리·정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술치료, 반려동물 매개 치료, 사회성 향상 집단 상담 등을 병행하며 중국어만 가능한 학생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서울시교육청과 연계한 순회 상담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김 교장은 다문화 교육을 "미래 시민을 위한 투자이자 국가 생존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 가지 교육 철학을 제시했다.
첫째, 다문화 학생을 결핍이나 복지의 대상이 아닌 우리 사회의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
둘째, 한국 학생과 이주 배경 학생이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공존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
셋째, 다문화 학교를 미래 교육의 실험장으로 삼고 그 경험을 다른 학교와 공유해 보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대동초는 '포용'을 넘어 '공존'을 꿈꾼다. 김 교장은 "모든 학생이 글로벌 역량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동안의 다문화 교육 경험과 노하우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체계화해 다른 학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도 했다.
서울 대동초등학교가 다문화 학생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면 서울 다문화 교육지원센터는 서울시 전체를 아우르는 허브다. 센터는 다문화 학생의 학교 적응을 돕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영등포구 영림초등학교 내에 자리 잡은 센터 내부에는 세계 각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그림과 설명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서울특별시교육청 학생 맞춤 지원 담당관 이자경 장학사는 센터의 역할과 다문화 학생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설명했다.
센터는 2019년 구로·영등포 지역에 집중된 다문화 학생 증가로 인해 설립됐다. 이 장학사는 "당시 서울 다문화 학생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 몰려 있어 남부권역을 중심으로 센터를 설립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센터의 명칭인 '다+온(ON)'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문화 학생을 돕는 것을 넘어 상생과 공존을 위한 세계시민 교육을 지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엔 중도 입국 학생이 빠르게 늘고 있다. 재혼 등으로 본국 자녀를 데려오거나 중국 내 교육 여건 악화 등 다양한 배경에서 온 학생들이다. 이에 따라 초등학생뿐 아니라 중·고등학생 대상 한국어 교육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이 장학사는 "이제는 단순히 기초적인 한국어 교육을 넘어 학습에 필요한 전문 한국어 지원까지 세분된 프로그램이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센터에서 운영하는 대표 프로그램 '한빛마중교실'은 입학 전 한국어와 학교 적응을 돕는 프리스쿨 형태로 오전엔 언어·공동체·예체능 수업, 오후엔 방과 후 교육이 이뤄진다.
센터가 특히 신경 쓰는 분야는 심리·정서 지원이다. 언어 장벽과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일부 학생들은 자해나 극단적 시도로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사례를 보인다. 이에 따라 이중언어 상담사와 임상 심리 전문가를 통한 맞춤형 지원이 진행 중이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정책적 한계도 있었다. 센터는 서울 유일의 다문화 교육지원센터로 남부권역에만 위치해 접근성이 낮고 한국어 교육에 집중된 정책 탓에 학생들의 다양성을 살릴 수 있는 지원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장학사는 "처음엔 서울 전역을 아우를 계획이었지만 예산과 인력확보 등의 문제로 현재는 남부에 한개의 센터만 운영되고 있다"라며 "센터의 적절한 지원 방법을 모르는 학교도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정작 지원이 가장 절실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최소한의 도움조차 받지 못하면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일 것"라며 제도적 한계에 대한 아쉬움을 전했다.
이 장학사 역시 김선희 교장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는 "다문화 학생은 단순히 한국 사회에 동화시키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자원"이라며 "이제는 포용을 넘어 그들의 고유한 특성과 잠재력을 살릴 수 있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대동초와 서울 다문화 교육지원센터. 두 곳의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과 관계자들은 다문화 학생을 단순한 '이주 배경 학생'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아이들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이웃'이자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정착하기 전 대림동 중국 동포 공동체의 토대를 만든 건 먼저 온 어른들이었다. 한중수교 직후 조선족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관련 제도조차 거의 없다시피 했다. 비자를 얻기도 쉽지 않아 많은 이들이 여행비자로 입국한 뒤 미등록 체류 신분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한국에 가서 한 달만 일하면 중국에서 1년 치 수입을 번다"라는 말은 당시 이들에겐 달콤하면서도 강력한 유인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중국에선 한족 중심 사회에 눌려 살았고 한국에선 불법 체류자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은 양쪽 모두에서 온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대림동 이주민 정착의 큰 기반이 되어준 서울 중국인교회를 찾았다. 예배실에 들어서자 최황규 서울중국인교회 목사가 기자를 맞이했다. 커다란 십자가 아래 조용히 자리한 공간에서 그는 이곳에 깃든 지난 시간을 차분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최 목사는 "처음부터 조선족을 위한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신학대학과 대학원에서 오랜 시간 보수 신학과 서구 신학 충돌 사이에서 고민한 그는 목회자의 길을 내려놓을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전환점은 1999년 이화여대에서 열린 국제 인권 심포지엄이었다. 목사가 아닌 한 개인의 관심으로 참석한 그날. 중국인 3명이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최 목사는 그들의 사연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날 이후 "최 목사를 찾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이 동포들 사이에 퍼졌고 그렇게 하나둘 돕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림동에 교회를 열게 됐다. 서울 중국인교회는 단순한 종교시설을 넘어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이들이 머무르며 안정을 찾는 쉼터로 자리 잡았다. 민원 상담부터 통번역, 법률문제 동행까지 종교를 넘어선 실질적 지원도 함께 이뤄졌다.
최 목사는 대림동을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잃어버린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자란 조선족들은 세종대왕이 누구인지, 이순신 장군이 어떤 인물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며 "대림동은 그런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 배우는 공간"이라고 했다.
대림동을 단순한 차이나타운이 아니라 '조선족 타운'으로 불리기를 원한다고도 했다. 그는 "조선족은 일제강점기 당시 삶의 터전을 잃고 동북 만주로 건너갔던 우리 민족이 6·25전쟁 등을 거치며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남은 우리 한국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어를 쓰는 중국 소수민족이 아닌 '돌아온 동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당시 기사와 자료를 한 장 한 장 스크랩해 가며 조선족 커뮤니티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다. "대림동에 조선족이 어떻게 넘어와 정착했는지를 알려줄 조선족 박물관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단순한 이민이 아닌 귀환' 최 목사는 그들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 아래 영상은 이 기사 내용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뉴스입니다. 구글LM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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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