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 더봄] 일본에도 이건희 같은 기업가가 있었네···오카야마현 오하라 미술관

[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35) 구라시키(倉敷) 미관지구(美観地区)에 위치 1930년 개인 소장품으로 개관한 사설 미술관 샤반의 '환상',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 등 전시

2025-07-10     양은심 번역가(영상/책)·작가
고대 그리스 로마풍의 오하라 미술관 정면 /사진=양은심

여행지에서 미술관을 찾는 습관이 생겼다. 덕분에 인생이 한 뼘쯤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잘 몰라도 그림을 보고 있으면 편안해진다. 이런 재미를 누리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림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부터가 쉰 살이 넘고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환갑을 눈앞에 눈 지금, 단체여행에 참여했을 때도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미술관을 찾곤 한다.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그러한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일정이었다. 첫날부터 미술관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오카야마현(岡山県) 구라시키(倉敷) 미관지구(美観地区)에 있는 '오하라(大原) 미술관'이다. 처음 가보는 지역에다 미술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림 감상 초보자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초보자여서, 지금 재미있다.

'게게게의 기타로' 전시관이 있는 구라시키 미관지구 거리 /사진=양은심

일본에서 살기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때였을 것이다. 오래 살았으면서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더랬다. 낮게 깔린 구름 위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뿌리를 내려보려고는 하는데 쑥 뻗지 못하고 까치발로 서서 흔들리는 식물처럼, 애매했다. 그런 애매함은 일본에 대해서 잘 몰라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둘러보고 싶었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라도 일본 열도에 발 도장을 찍어보자.

그런 마음을 품은 지 다시 십 년 정도가 지났을까.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시부모를 돌보는 생활도 마감했다. 오랫동안 품어 온 일본 열도에 발 도장을 찍어보고 싶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통비와 숙박비가 비싼 일본에서 개인 여행만으로 전국을 도는 것은 주머니 사정상 어려운 일이었기에 주로 단체 여행을 이용하고 있다. 전국을 돌기로 작정하고 나서니 두어 개의 현을 돌아주는 여행 상품은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오하라 미술관 앞을 흐르는 좁은 강가의 풍경 /사진=양은심

도쿄역에서 신칸센 노조미 85호 히로시마행에 올라탔다. 오카야마역까지 약 3시간 반을 달린다. 나고야, 교토, 신오사카, 신고베, 히메지를 거쳐 목적지인 오카야마역에 도착했다. 우리가 내린 후 노조미 85호는 히로시마를 향해 출발했다.

노란색 로컬 전철을 타고 구라시키 역으로 이동하여 밖으로 나오니 ‘어서 오세요, 구라시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버스는 내일부터 오기로 되어 있어서 오하라 미술관이 있는 미관지구까지는 걸어서 가야 한단다. 

안내원도 처음 와 본다며 태블릿 지도를 켠다. 일행 중에는 불안한지 구글 맵을 켜는 사람도 있었다. 소소한 술렁임조차도 재미있어 보이는 건 아마도 여행 중이어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출발을 기다렸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딴 카페 ‘엘 그레코’ /사진=양은심

미술관이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갑자기 타임슬립 한 느낌이다. 마을 안을 흐르는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정갈한 마을이 자리 잡았다. 강물 위를 관광객을 태운 배가 오간다. 

강가에는 연륜이 느껴지는 건축물들이 나지막이 늘어서 있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딴 카페 ‘엘 그레코’의 빨간 현관 지붕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 향하는 목적지는 미술관이다. 눈길만 주고 지나쳤다.

오하라 미술관 안내판 /사진=양은심

'오하라 미술관'에 대해서 찾아보던 중 큐레이터 출신 작가 하라다 마하(原田マハ)의 <낙원의 캔버스>의 도입 부분을 읽었다. ‘제1장 판도라의 상자 2000년 구라시키’에 피에르 프뷔 드 샤반(Pierre Puvis De Chavannes)의 '환상/Fantasy'이라는 그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오하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해서다. 처음 들어보는 화가였고 작품이었다. 이런 처음과의 만남은 초보자여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낙원의 캔버스>는 2015년에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시작은 이렇다.

‘여기, 희끔하게 파리한 공기에 둘러싸인 한 장의 그림이 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는 페가수스, 그 목에 덩굴을 던지는 나부, 그녀의 발밑에서 꽃을 따는 알몸의 소년.’ 

어떤 그림인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검색하지는 않았다. 미술관에서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새벽 공기에 싸여 있는 그림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오하라 미술관 입구 /사진=양은심

서른아홉 명의 투어 일행이 일제히 미술관으로 들어간다. 나는 한차례 일행이 빠진 뒤에 천천히 그림을 보고 싶어서 잠시 기다렸다. 한산해졌다고 생각될 즈음에 미술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살금살금 다가간다. '환상'과의 대면이다. 생각보다 큰 그림이었다. 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다. 파스텔 톤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눈에 새겨 놓기 위해서.

도록 사진. 피에르 프뷔 드 샤반의 '환상'. 실제 그림보다 사진 색이 좀 진하다. /사진=양은심

이어지는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 이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된 화가이고 그림이었다. 종교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그림 앞에서는 잠시 서 있었다. 나 홀로 참가한 여행이니 누군가의 흐름에 맞출 필요는 없었다. 내 마음이 만족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이 미술관은 이밖에도 모네의 '수련' 등 근현대 서양 미술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서양화 외에 일본 작가의 작품도 많이 전시되고 있었다. 

도록에 실려있는 사진.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 /사진=양은심

오하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은 무려 300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화가 고지마 도라지로(児島虎次郎/1881~1929)의 그림도 볼 수 있었다. 

그중에 나팔꽃으로 만든 아치와 유카타를 입은 소녀를 그린 그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원에 아치' 하면 장미를 떠올리게 되는데 나팔꽃이라니. 우리 집 현관에 재현해 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그린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종종 이러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있다.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오하라 집안의 저택 /사진=양은심

오하라 미술관은 1930년에 오로지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郎/1880~1943) 씨의 개인 소장품만으로 개관한 일본 최초의 사립 서양 미술관이다. 미국의 모마 미술관이 1928년에 개관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에서는 종종 기업가들이 만든 사립 미술관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놀라게 된다. 어떤 심정으로 그림을 사 모으고 미술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지···.

여성경제신문 양은심 번역가(영상/책)·작가 eunsim0304@gmail.com